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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17. 2023

기타 그리고 용돈

오래 쓰는 육아 일기


손톱 아래가 도톰하다. 손가락 끝, 거기를 뭐라고 부를까. 왼손으로 기타 코드를 잡다가 내 손가락은 유난히 그 부분이 두터운 것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줄과 줄 사이에 쏙 자리 잡고 가볍고 매끄럽게 움직이면 좋을 텐데..... 탓을 한다. 손가락이 길지도 않고 둔한 것만 같다. 이것 때문에라도 기타를 못하겠군. 아주 단골로 등장하는 대사다. 그 대사도 얼추 시간이 지나면 싹 잊고 남의 대사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8월 15일 광복절 기념으로 우리는 기타를 마련했다.


¶어제는 특별한 날이었다. 낮잠을 자다가 산이가 즐겁게 기타를 치는 소리에 깼다. 줄이 하나 끊어진 오래된 기타를 갖고서도 저렇게 적극적이라니, 내가 갖지 못한 즐거운 울림이 귀에 들렸다. 기타를 사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줄만 바꿔서 내 기타를 쓰겠다는 것을 마음에 드는 것으로 구입해 주고 싶었다. 문득 강이도 눈에 들어왔다. 계획에 없던 말이 튀어나왔다. 강이도 기타 갖고 있으면 하나씩 배울 거 같은데? - 어제 일기에서.

악기점에 들렀다. 시를 쓰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시 한 편 쓸 수 있기를 희망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쓰네, 마네 할 것도 없고 관심 둘 것도 없어서 편할 것인데 못 쓰는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좋아하는 것만큼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이 있을까. 그것이 무슨 악기든 악기라는 이름은 내게 어떤 시가 된다. 잘 아는 오래된 시가 아니라, 새로 지어내야 하는, 아직 세상에 없는 그런 시가 된다. 사람의 숨이며 손으로 연주하는 시, 악기의 줄이며 몸에서 흘러나오는 시가 쓰고 싶어진다. 님프들이 두드리지 않는 문 안쪽에서 나는 또 끄적거리기로 했다. 이 기타도 좀 고쳐 주세요. 그대로 놔두고 오래돼서 낡은 것을 일부러 챙겨 왔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미안하잖아. 산이와 강이가 마음에 들어 하는 기타를 하나씩 구입하고 내 낡은 것은 헤드, 넥, 보디, 싹 다 말끔히 씻고 여섯 개의 줄도 새로 갈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미치 앨봄의 '매직 스트링'을 흥미롭게 읽고 있는데,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멋지다.

봄봄봄 봄이 왔네요, 차 안에서 방금 산 기타로 산이가 노래를 한다. 아이가 노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던가? 어린이집 졸업하던 무렵에 봤던 춤이며 율동이 꽤 근사했었는데, 가끔 그 모습이 떠올라 혼자서 웃을 때도 있다. 중학교에 가서는 반 아이들 앞에서 피아노를 선보였더니, '인싸*'가 되었다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던 아이가 오늘은 노래를 부른다. 저 노래를 다 부르는 날에는 기타가 얼마쯤 늘었을까. 그때 산이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를 쓰는 사람이겠구나. 음악이 사람을 키우는 순간들을 촘촘히 맞이하겠구나. 아침이면 물을 뿌리고 낮에는 햇살을 받고 바람이 부는 저녁 무렵에는 별을 노래하겠구나. 계절이 흐르겠구나. 봄봄봄 노래가 어느 계절, 어느 나무 아래로 흘러갈까. 너는 소녀를 만날까.

우쿨렐레를 2학기에 배우기로 했다며 나처럼 손가락 타령을 먼저 쏟아내는 강이는 어떤 이름을 지었을까. 강이는 이름 짓기가 선수다. 방에 있는 인형들마다 이름이 있고 영화를 보고 나서도 다음날이면 거기 나왔던 누구는 누구냐며 지난 순간을 상기시킨다. 우리를 환기시킨다. 스토리 안에 살포시 녹아 있는 스토리를 발견하고 다듬는 사람이 강이다. 나는 아침마다 내가 쓴 것들이 미덥지 못하면 옆에 앉아서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슬그머니 내민다. 읽어보라고. 읽고 나서 예쁜 말 하나 건네주라고. 강이는 학교에 다 도착할 때까지 천천히 읽고서 그만 차에서 내린다. 잘 봤다는 말만 남기는 프로다. 나는 더 노력해야 한다는 말 같아서 붕, 속도를 높인다. 그래도 하늘이 푸르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침들이다.

기타 두 개를 45만 원에 결제했다.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카드가 무엇인지, 계산은 어떻게 되는지, 돈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도 다 아는 것은 아니라서 아직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 나도 여전히 돈에 휘둘리느라 정신없을 때가 많다. 아무리 배워도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지혜롭기를 바란다. 지혜는 사람을 모나지 않게 하니까. 네모난 세상에서 가능한 덜 부딪히고 더 자유로우려면 아무래도 둥근 모양이 좋다. 유치원 선생님부터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들도 우울하거나 화난 표정들이고 부모들은 부모들대로 근심이 가득하다. 무엇이 사람들을 험지로 내모는가. 아직 우주에는 다른 생명체의 흔적이 없다는데, 우리를 몰아대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산이에게서 그렇지 않아도 문자 메시지가 왔었다고 그런다. 산이는 하루에 교통비와 식비, 간식비로 만 원 정도 쓰고 있다. 매주 6만 원씩 계좌로 용돈을 받는다. '엄마, 나는 누구한테 용돈을 받지요?'

아빠가 45만 원을 결제하는 하는 것을 옆에서 봤던 탓이다. 이번 주 용돈이 들어올 날인데 아직 소식은 없고, 저는 돈을 써야 할 데가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먼저 엄마한테 달려들고 말을 걸고 부탁을 하고 응석을 부린다. 그게 엄마다. 세상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다. 사실 5만 원을 어제 낮에 산이에게 보냈다. 화요일에는 학교에 가지 않았으니까 만 원을 덜 보냈다. 만 원을 덜 보내면서도 생각은 더 많았다. 돈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 만 원의 차이로 산이가 그것을 알았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시도는 했다. 때로는 6만 원보다 더 고마운 5만 원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내 바람일 뿐이지 세상은 자기의 운행 방식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안다.

다시는 기타 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이들 덕분에 왼손 손가락 끝이 얼얼하다. 손톱을 너무 바짝 깎은 것도 걸리적거린다. 역시 악기는 시를 쓰는 일처럼 어렵다. 나는 소질이 없으면서 왜 그것을 좋아할까. 이런저런 생각이 평화롭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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