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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처럼 Aug 27. 2023

엄마 생일에

오래 쓰는 육아 일기


"아빠가 조금 서운해 할 수도 있어."

수요일 아침 등굣길은 여유로웠다. 약속 시간에 맞춰 출발하면 도로가 붐비지 않고 차들이 수월하게 빠진다. 오빠를 내려주고 강이네 학교로 향했다. 큰 도로에 다시 접어들고 물었다.

"내일 엄마 생일에 뭐 줄 거야?"

앞자리에 앉아 줄곧 전방을 주시하는 아이를 보면서 그날의 여러 가지 것들을 예감하거나 살핀다. 어제 같은 경우는 감각적이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어쩐지 표정이 가볍지 않았다.

"학교가 재미없어?"

그렇지 않아도 중학교 1학년이 여간 다루기 어려운 학년이 아니라고 다들 이야기한다. 강이도 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 입을 쭉 내밀고 반응이 없다.

"그게 아니고, 오늘 체육 들었는데 깜박하고 체육복을 놓고 왔어."

말을 하지, 왜 아무 말도 없이 가만있었냐며 따졌을 것이다. 십중팔구 분명 그랬을 것인데 어제는 시간이 우리 편이었다. 이럴 줄 알고 미리 움직였다고 해도 어제만큼 타이밍이 좋게 떨어질 수는 없었다. 여유는 사람을 천사로 만든다. 돈이든 마음이든 시간이든 여유롭고자 하는 마음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 바로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돌고 집까지 10분, 거기서 다시 학교까지 전용 도로로 달리면 10분 안에 도착할 타이밍이다. 얼굴 찌푸릴 것 없다.

다시 수요일 아침, 학교까지 두 정거장 남은 8시 10분으로 웜홀.*

"나는 안 서운한데, 그런 거 없어, 전혀!"

"그래도 서운할 거야."

마치 서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투다. 마땅히 그래 줄 거라 믿는 저 투구, 포심으로 꽉 찬 스트라이트를 꽂는다.

산이도 학원을 마치고 집에 왔다. 8시 반에서 9시 사이라고 미리 서로 시간을 정했다. 그래, 그래, 다 모였다. 자, 자, 낮에 사 온 케이크를 꺼내고 일'부'러' 쉰 & 여섯이나 되는 초를 일'일'이' 꽂는다. 기회는 찬스라고, 삿포로 맥주도 - 내가 좀 좋아한다 - 슬쩍 테이블 위로 등장시킨다. 예전에 호프집에서 흔하게 듣던 컨그레츄레이션 그러면서 빵 터뜨리는 노래를 틀어놓고 거실과 부엌을 왕복한다. 준비하는 준비도 모두 이벤트가 된다. 아, 참, 오늘 낮에 범칙금 통지서를 받았다. 우리 집에 저분은 비교적 국고 國庫에 협조적인 성품을 간직하셨다. 특히 도로상에서 그냥 달리거나 그냥 차를 세워놓고 그에 알맞게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는 데 아무런 거침이 없다. 아마 청소년기에 질풍노도의 시절을 다 겪어내지 못했던 듯싶기도 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민원 처리에 얼마나 시달려서 저럴까도 싶어, 속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정도는 냉장고에 넣어둔 보리차로 꿀꺽 식혀버린다. 이번에도 학교 앞, 과속이었다. 이건 비밀인데 십몇 만 원을 끊어본 적이 있는 사람? 교통 범칙금으로 그 정도 내본 적 있는 사람은 아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속은 그분께서 하시고 돈은 내가 낸다. 솔직히 과속하는 사람은 그 아까움을 잘 모르는 듯하다. 깜박 잊고 다시 이렇게 딱지가 날아오는 것을 보면... 그래도 이번에는 6만 원이었다. 기간이 지나면 7만 원, 기간 이전에 순'순'히 내면 5만 4천 원. 후딱 계좌이체를 했다. 손이 떨렸다.

"아무래도 생일 선물은 이걸로 대신해야겠군."

그리고 그 아래 7만 원이라고 쓰여 있는 부분만 찍어서 보냈다.

답장이 금방 왔다.

짧고 가볍고 강렬했으며 무심하게도 보였다. 감정이 없었다.

"ㅠㅠ"

산이와 강이는 도저히 모를 것이다. 저희들 엄마는 천사로만 알고 사는 이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나는 그 천사의 뒤처리를 티'도'안'나'게' 그리고 용'의'주'도'하'게 돕는다.

애들 앞에서 '벌금'으로 생일 선물을 대신했다고 그러는 것도 잘 생각해 보면 '내 무덤'을 파는 꼴이다. 애들은 애들이다. 물아래에서 열심히 갈퀴질 하는 백조를 볼 줄 아는 애들이 어디 있는가. 다들 은빛 물 위에 떠서 자태를 뽐내는 저 날갯짓에 감탄하느라 정신없다. 나도 보험을 들어둘 필요가 있다. 나도 착한 척하고 여유를 부린다. 꼰대라는 말도 아이들은 다 아는 나이가 됐다. 생일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것은 알아서 삼갈 줄 알아야 한다. 그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생일 여파가 남아서 아마 어려울 것이다. 지난 내 생일에는 산이 성적표가 다 도착하지 않았던가. 그때도 입을 꾹 다물고 살아내느라 얼마나 가슴이 아렸던가.

깨끗하고 하얀 봉투를 건네면서 '백만 원'이야, 그랬다.

반응이 심상치 않은 애들은 역시 애들이다. 칠십만 원이나 미리 썼으니까 - 애들은 또 무슨 소린가 한다 - 이 정도면 충분하지, 그러면서 시치미를 뗀다. 그래, 멋진 표현, 시치미!

나는 그러고 보면 무슨 일이든 협조적이다, 나는 비둘기파가 맞다. 그런데 어째서 삶은 나를 날렵하고 사냥하는 매파로 대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스스로 시치미를 떼기로 한다. 거기서부터 잊기로 한다. 부드러운 매도 있으면 좋지 않겠나. 아내의 수고는 물론 백만 원을 훨씬 웃돈다. 그 돈으로는 턱도 없다. 그래도 나는 백만 원을 선물로 주지 못한다. 나는 쓸 데가 많다. 미안하지만 내가 쓸 곳이 많아서 그대에게 줄 것이 많지 않다. 그것이 잠시 미안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 미안함은 부끄럽지 않아서 좋다. 같이 산다는 것은 같이 벌어서 같이 나눠 먹는다는 말이니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하고 같이 살고 있으니까. 그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장모님한테도 이백만 원이라고 그러고 그런 식으로 0 하나를 맘대로 덧붙인다. 곧 부도날 인생이다. 웃으면서 그래봐야겠다. 어디 해외 토픽에라도 나올까.

강이는 다들 방으로 몰더니 생일 맞은 엄마부터 눈 감고 나오라고 손을 끈다. 거실 불도 다 끄고 진지한 표정으로 장난치고 있다. 순식간에 거실이 전시실이 되고 어디서 봤는지 붉은 카펫도 급거 제작해서 깔았다. 사진이며 액자, 그동안 휴대폰에만 저장되어 있던 사진들을 인쇄해서 여기저기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스토리 + 스토리 전시다. 막간에는 손 편지를 건넨다. 아빠한테는 도서 상품권 주더니만!

알았으니까 진정하라는 손짓으로 내게도 편지를 내민다.

to, 아빠

내가 아빠 생신 때 편지도 안 쓰고 문화 상품권만 준 게 조금 마음에 걸렸어. ㅠ 그래서 아빠한테 줄 편지도 준비했지.

생략,

편지 쓰면서 생각해 보면 거의 다 아빠 속만 쓰'리'게' 한 것 같아. ㅠ 미안해! 하지만 혼날 때마다 나는 "왜 내가 혼나야 되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그리고 아빠랑 같이 지낸 추억만 생각해도 실실 웃음꽃이 피어!

비둘기가 난다. 아니, 새들이 난다. 그 하늘에는 수리부엉이도 독수리도 보라매도 까치와 까마귀도 종다리, 벌새까지 자유롭다. 우리는 하늘이었는지도, 새인 줄 알고 살았는데 새는 차라리 마음 같은 것이었고 우리는 하늘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하늘에 기대고 하늘은 하늘에 안기고 하늘은 하늘이 된다. 그러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고 사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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