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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27. 2019

괜찮아질 겁니다.

당연한 시간


우리의 한 달은 마치 일 년 같았다. 하루 24시간을 72시간처럼 썼으니까. 마음이 크기는 시간에 비례하지 않다는 걸 그때 알았다. 우린 아주  뜨겁게 사랑했고, 뜨겁게 이별했다. 열정적이었던 사랑만큼이나, 괴로운 이별이 따라왔다. 어디선가 적극적으로 이별을 마주 할수록 빨리 괜찮아진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지독하게 너를 추억했고, 너를  미워했다.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고통스러웠지만, 너와의 시간을 하나하나 새겼다. 시간이 지나면 너의 얼굴과 너의 온기와 너의 따뜻했던 눈빛과, 너의 목소리까지 절대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것들이 희미해질걸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 힘들었다. 지난 사랑 앞에서 인간은 망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괜찮습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괜찮아요.’라는 말이 그렇게도 싫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턱 막히고 화가 났다. 그것만큼 잔인한 단어가 없었다. 괜찮아지려면 기억을 지우고 덮고, 외면해야 했으니까. 괜찮아지기 위해서는 마음을 깎아내야 하는 고통이 뒤따랐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나의 마음까지 결정 지어요. 당신이 뭔데 내가 괜찮아질 거라고 확신해요. 지금 그 말 본인 한테 하는 거죠? 나는 전혀 괜찮아질 생각 없어요. 괜찮아지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괜찮아질 거라고 말할 상황 만들지 마요.’


그는 마지막에 떠날 때  그녀에게 ‘전부 괜찮아질 겁니다. 우리 둘 다 괜찮아질 거예요.’ 하고 무채색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슬픔을 가득 머금은 눈을 한 채 기계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그런 눈을 하고 잔인한 말을 내뱉을 거면, 차라리 하지나 말지, 그녀는 그의 앞 뒤 하나 맞지 않는 표정과 행동에 화가 났다. 그는 자신도 무던히 괜찮아지려고 애쓰고 있으니 자신을 더 이상 흔들지 말라고 했다.


그는 그녀를 끊임없이 밀어냈다. 하지만 그녀에게 사랑하니까 멀어진다는 그런 병신 같은 공식은 적용되지 않았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아니고 뭐 이렇게 장애물들이 많은지, 왜 우리는 사랑을 할 때 불안에 떨고 두려워하며 오지도 않은 결말을 예상할까. 행복하기만 하면 안 되는 걸까. 도망치는 그가 원망스러우면서도, 미워지지 않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차라리 그가 죽어버렸으면, 눈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라진 후에 자신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걸 알았다.


이름 모를 죽은 별들과 거리의 모든 생명이 멈춘 것  같은 밤하늘 아래, 둘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서로의 침묵이 온 공기를 감쌀 때, 그는 눈물을 훔쳤고  ‘괜찮아질 겁니다. 전부 괜찮아질 거예요.’라는 말을 남긴 채 일어났다. 그녀는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울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사라짐과 동시에 스스로의 마음을 조각내서 함께 버렸다.




그녀는 가끔 자신의 기억력이 너무 좋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야 하는 기억은 오히려 선명해졌다. 그것도 행복하고 설레었던 기억들만 유독 선명해졌다. 누군가의 얼굴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 그와 같은 말투, 그와 비슷한 행동, 그의 표정, 그의 향기, 그의 따뜻함을 찾았다.


감각에 남아있는 기억은 더욱더 잔인하게 그녀를 괴롭혔다. 모든 감각이 유독 그에게만 너무나도 생생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죽고 싶었다. 차라리 아무도 만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적어도 생각은 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숱한 고뇌의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녀는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며 괜찮아지고 있는 중이었다. 변하지 않을 거라던  마음에 서서히 안정이 찾아오는 순간 자신의 간사함에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생애 다시없을 사랑이라 생각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다. 하지만 영원할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은 오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라는 이 진부한 말이 정답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 결국은 받아들일 거면서.


없어지지 않는 기억 위에 새로운 기억을 덮고, 잃어버린 마음에 눈을 뜨는 순간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감정들은 바람에 불이 꺼지듯, 어느 날에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어느 날에는 끝까지 꺼지지 않기 위해 작은 불씨 하나를 가지고 버텼다. 지겹게 반복되는 과거와 현재의 낭만과 고통의 순환.


그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전부 괜찮아질 겁니다.”


그녀가 답했다.

“괜찮아지는 중이에요.”


괜찮지 않더라도, 괜찮아야 한다.

원래 모든 것의 마지막은 치열하게 힘들수록, 빨리 괜찮아진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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