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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Mar 11. 2020

코로나19가 시사하는 것들

삶과 죽음

아시아는 물론 유럽까지 세계는 지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떠들썩합니다. 백신이 계발되지 않은 이 바이러스는 사람들을 극심한 공포로 몰아넣습니다. sns에는 불안을 극대화시키는 기사들이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뉴스에는 연일 이와 관련된 속보들로 잠잠할 날이 없습니다. 거리에는 사람이 줄어들고, 중국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많은 기업들은 물론, 국가 간의 교류에도 큰 피해를 받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종 혐오라는 사회적 이슈까지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비단 국내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영역을 확산시키는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전 세계를 자신의 영토로 확장했습니다. 도시 내 이동은 물론 국가와 국가 간의 이동마저 어려워졌습니다.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바이러스 때문에 약국과 마트에는 마스크와 소독제의 품귀 현상이 일어나고 있으며, 누군가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도 합니다. 신종플루 사태 이후 11년 만에 중앙재난 안전대책본부에서는 위기 경보는 '심각단계'로 격상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가 코로나 19 바이러스에 집중합니다.


아마도 바이러스하고 하는 것은 인간의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지속될수록 우리 인간의 일상은 점점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린이집은 물론 초중고,대학교의 휴교령, 회사의 재택근무, 화상 수업과 업무, 자영업자의 폐업,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 호소 등 이로 말할 수 없는 피해들과 문제들의 연달아 발생합니다. 아직 국내 치사율은 0.7%밖에 되지 않지만 이 또한 안전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삶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불안함과 더불어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처럼 이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포함한, 지난 신종플루, 사스, 메르스와 같이 몇 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전염 바이러스는 국제에 다양한 문제들을 가져옵니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죽음에 대해 무척이나 예민하게 반응하며 늘 불안해하고 외면해왔습니다. 과거에는 불로장생을 꿈꾸며, 몸에 좋다는 약재를 발견했고, 현재는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매년 늘리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과학 연구들은 ‘더 오래 살기 위해, 또는 편안함을 위해’라는 수식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삶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바이러스를 없애기 위한 백신 계발도 그 일환 중에 하나인 셈이죠.  


SNS에서 이런 말을 보았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살기 싫다고 습관처럼 말하고 다녔는데, 코로나 19가 터지고 나서 세상 열심히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 난 아직 살고 싶구나'.라고 생각했다." 재치있는 말처럼 보이지만, 이 말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아주 깊은 욕망이 내포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인간의 삶은 미련 덩어리다',  ‘인간은 신이 되고 싶어 한다’라는 말들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 왜 이렇게도 나약한 존재가 되는 걸까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살기 위함'입니다.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는 모든 이유는 결국은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는  “우리 모두 죽음을 비켜갈 순 없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가 죽음을 마주 보아야 하는 이유죠’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마주 한다는 것은 삶을 마주한다는 것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순간이 모인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더 잘 죽기 위해 더 잘 살아야 하는 겁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만 있지 '잘 살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다. 사실, 어쩌면 당연합니다. 먹고살기 바쁘고, 자신의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이 바로 '왜'입니다. 피곤하고 불편해도 던져야 하는 질문입니다. 우린 목적과 의미 없이 '애착'에만 몰두하는 건 아닐까요.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무자비한 애착은 타인의 삶을 가볍게 여기기도 하고, 쉽게 개인주의로 빠져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어쩌면 세상에 만연한 집단 이기주의는 잘못된 삶의 대한 애착에서부터 탄생한 것이 아닐까요. ‘생명’ 자체에 대한 고귀함 보다는 지극히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건강하지 못한 애착인 셈이죠. 그리고 이런 집단 이기주의가 몸집을 늘려 세상을 각박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요즘 누군가를 만나는 일 조차 무서워지고 눈을 맞추고 대화를 하는 일도 부쩍 줄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온기가 사라져 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은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이 땅에 보냈다고 합니다.  삶을 사랑하라는 의미에서 말이죠.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에 무뎌지고, 익숙해져서 점점 차가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세계는 떠들썩합니다. 언제쯤 이 사태가 나아질지 알 수 없습니다. 원치 않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백기가 생기게 된 지금, 한 번쯤 삶과 죽음에 대해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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