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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Jul 14. 2020

무거움과 가벼움의 역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사랑과 섹스는 별개인가”,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있는가” 다양한 단어로 치환되는 이 질문은 결국 육체와 영혼의 상관관계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몸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합일을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것은 결국 이 둘을 개별적인 존재로 볼 수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명제는 아니다. 그래서 개인의 명제충돌갈등을 일으키기도 한다.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섹스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단순히 육체적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는 아닐 것이다. 살과 살이 맞닿는 순간 전해지는 정서적 안정감이나 상대로 하여금 사랑을 받고 있다는 애정의 확인과 정신적인 만족감을 포함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 중요한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육체를 통한 모든 행위들은 결국은 정신적인 만족을 위한 것일 텐데, 다른 방법으로 정신적 만족이 이뤄진다면 육체적 교류는 없어도 되는 것일까? 흔히 반대의 개념이라 불리는 플라토닉 사랑과 에로스 사랑이 가장 대표적이겠지만 특정 행위를 기준으로 이 둘을 이분법적 사고로 나누기 애매하다. 물론 개인의 취향과 신념을 배제하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게 사랑과 섹스는 별개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행위 자체에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사랑과 섹스는 하나의 목적에 의해 합일되어야 하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가벼움이 무거움으로 치환되는 순간이며 육체와 영혼이. 플라토닉과 에로스가 같아지는 순간이다.


사랑과 섹스의 문제뿐만 아니다. 삶의 무수히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그렇다. 신체 저항 능력의 저하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비슷하다. 다양한 환경으로부터 받는 신체적 긍정성이, 긍정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육체의 상태가 영혼의 상태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일들을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매 순간 마주하게 된다.


전혀 하나가 될 수 없다 생각했던 두 명제는 인간의 ‘의미부여’에 의해 하나가 된다. 의미가 결여된 삶의 가벼움이 싫어 무거움으로 스스로 뛰어들길 자처한다. 그러다 다시금 그 무게에 짓눌려 책임과 속박과 ‘그래야만 하는 모든 것’들을 내던지길 반복한다. 이 반복은 ‘키치’라 불리던 모든 것의 무의미를 걷어내고 낭만 부여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사랑과 섹스를, 육체와 영혼이 동일하다는 명제를 다시 한번 증명하는 셈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육체의 본능과 욕망 속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갈 것이냐의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허나 인생의 방향성은 계속해서 바뀔 것이다. 인간은 삶의 무의미와 허망함에 두려움을 느낌과 동시에 의미와 진실을 경멸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지워내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에게 삶이란 지겹도록 발버둥치며 영원의 순환 속에 살아가는 것이며, 결국엔 삶은 아름다운 감옥이라고 하는 역설을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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