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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Nov 18. 2021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와 담을 쌓은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랬던 내가 요즘엔 꽤나 많은 배움 속에서 살아간다. 경험이라는 큰 무기에 깊이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스스로 배움을 찾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공교육을 받았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보면 내 자리는 늘 뒷줄이었다. 사물함과 가장 가까운 뒷줄에 앉아 선생님 몰래 인터넷 소설을 읽거나, 지우개로 조각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 어릴 때면 누구나 그렇듯 공부보단 다른 것들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고학년에 되어서는 소위 말하는 '노는 친구들' 사이에 끼어있기도 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었는지 적당히 공부해도 늘 중간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곤 했다. 포기할 법도 했던 공부의 끈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다. 노력에 비해 좋은 결과가 나오다 보니 최소한의 시간 투자를 하며 학생으로서 나름의 생존 방법을 찾았던 결과라고나 할까. 물론 그 때문에 공부에 별 흥미를 붙이지 못했던 것 같지만 말이다.      


공부에는 큰 뜻이 없었던 내가 유일하게 열정을 다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미술이었다. 어릴 때부터 꾸미고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었음에도 미술 대회에 나가면 매번 상을 받아올 정도로 재능이 있었다. 그래 봐야 초등학생이 그린 알록달록한 그림에 불과했지만 주변의 칭찬과 함께 상을 여러번 받아올 정도였으면 초등학생 치고 실력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미술에 대한 애정은 디자이너라는 꿈을 꽤나 오랫동안 꾸게 해 주었다. 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다. 음악과 노래도 그중 하나였는데, 피아노를 하는 사촌 언니 때문에 우연히 보게 된 뮤지컬을 계기로 배우라는 꿈을 새롭게 가지게 됐고, 그 후로는 일찍이 고등학생 때부터 진로를 정해 공연판에 꽤 오래 몸을 담았다.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에너지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는 행위에 큰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현재는 미술도 공연도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았던 점은 하고싶은 것이 많았고, 좋아하는 일은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부모님도 그걸 아셨는지 딱히 공부를 강요하진 않으셨다. 후에 다니던 대학을 과감히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도 반대가 전혀 없었다. 나중에야 졸업장은 따는 게 어떻겠냐며 얘기하셨지만 마음이 동해야만 움직이는 성격이라는 걸 아셨는지 몇 번 이야기한 후에는 굳이 언급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어릴때부터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 삶을 살았다. 단 조건이 있었다. 내 선택에 대한 책임 또한 나의 것이라는 것.  

 

돌아보면 내가 해왔던 선택들은 직접 경험하고 부딪히면서 그 속에 온 몸을 내던지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배움들을 믿고 의지하는 편이었다. '세상은 넓고 경험할 것은 많다!'라는 마인드가 가치관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까. 가만히 앉아서 지식을 습득하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다 생각했다. 물론 내가 관심 있어하는 분야에 대해서는 파고들었지만 지나치게 한정적이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다양한 경험들을 몸소 체험하며 남들보다 세상을 일찍 알고, 넓은 시각을 가진것에 흡족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젊은 날의 패기와 당당함이 곁들어진 허세이기도 했다. 그러나 곧 한계에 부딪혔다. 세상엔 경험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한 가지 분야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고뇌하며 얻어지는 깨달음과 성취 같은 것들 말이다. 내가 선택한 경험들은 다양성을 선물했지만 깊이감이 떨어졌다. 돌아보면 공부도 그렇고 미술고 그렇고 뭐든 남들보다 비교적 빠르게 익히고 배우던 탓에 금세 흥미를 잃었다. 스스로 끈기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 건 스물 한두 살 때쯤이었던 것 같다. 끈기 부족은 새로운 모험에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약점이기도 했다. 적당한 노력으로 쉽게 칭찬과 인정을 받다보면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는 선택을 하지 않게 된다. 그렇다고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다는것은 절대 것은 아니다. 다만 공부에 대한 영역에서만큼은 스트레스를 받거나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기억은 없다. 삶에 대한 깨달음은 언제나 내가 찾아 나서기  전에 나에게 왔고,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꽤나 잘 해왔다. 그렇다 보니 깊은 지식에 대한 갈증과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나의 경험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공부에 목말라하던 시기가 찾아왔는데 경험에 의지한 배움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무렵이었던 같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쌓아왔던 데이터에 변수가 생겼고 나의 부족함이 드러나는, 소위 말해 까발려지는 순간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은 넓고 경험할 것은 많다' 라는 가치관에서 '세상은 넓고 알아야 할것은 많다'라는 가치관으로 변화하는 삶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나의 얕음을 잘 숨겨왔던 걸지도 모른다. 어릴 때야 경험의 양이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 수단이 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경험과 함께 전문성 즉,깊이감을 요구하는 일들이 많아진다. 그 진리를 깨달은거다. 그렇다고 나의 경험이 부질없는 것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음에는 분명하다. 단지, 사람은 누구나 발전하고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마련인데 나에게는 배움이라는 영역에서 그 욕구가 발현된 것이다.




몇년 전년부터 조금씩 사부적 거리며 공부하는 것들이 늘어나고있다.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즐거움을 알아가고있다고나 할까. 지식을 갖춘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싶다는 작지만 큰 소망이 생겼다. 갑자기 주식이니 코딩이니하는 전혀 관련도 없는 것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문과형 인간인지라 숫자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다. 지금의 배움 또한 지극히 내가 잘할 수 있는 영역에 한정되어 있다. 다만 지금껏 해왔던 배움의 방식과 다른 방식을 택하면서 그 안에서 차근히 넓혀가고 있다. 어떻게 하면 삶에 깊이를 더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나를 공부하게 만든 걸 지도 모른다.


가슴형 인간에서 머리형 인간으로 변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태생적으로 사용되는 영역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머리와 가슴을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할 뿐이다. 치열한 고민의 끝에 스스로 선택한 배움이라면 한 번쯤은 시작해봐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이 전부이다. 늘 내가 새로운 경험을 선택했을때 그 마음처럼 처럼 말이다. 그래서 요즘 공부에 흥미와 재미를 느끼는 일이 꽤나 즐겁다.

                      

내년에는 아마도 '공부'가 가장 큰 키워드로 자리잡는 한 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조금더 빨리 시작할껄이라는 후회는 하지 않는다. 뭐든 때가있기 마련이니까. 그래야 머리를 싸매며 고뇌하고, 때로는 정답을 찾을 수 없어 스트레스 받는 날들까지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겪어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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