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나'를 마주 한다는 것은.
마르틴 부버가 이야기한 '나와 너'의 관계란?
부버에 의하면 인간은 ‘나'로서만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가 말하는 ‘나’는 ‘너와 너’의 ‘나’이거나, ‘나와 그것’의 ‘나’이다. ‘나와 너’의 관계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야만 만날 수 있으며, 대화적인 관계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의도에 따라 ‘너’를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의 관계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격의 세계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우리는 절대 ‘너’없이 ‘나’로 존재할 수 없다. 참된 만남은 ‘나와 너’의 관계를 통해 가능하다. 그러나 ‘나와 그것’의 관계는 독백적인 관계이며, 나의 의도에 따라 ‘그것’을 판단할 수 있다. 목적과 수단을 기반으로 한 관계이기에 지식의 세계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참된 만남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나와 너’의 관계가 한 번의 성립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나와 너’, ‘나와 그것’의 세계는 영원하지 않다.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끊임없이 그 사이를 오고 간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너’의 관계를 이루려고 의식해서는 안된다. 그 마저도 '나'의 목적이나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만남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스로를 열고 진정한 만남의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것뿐이다.
요즘 나의 어둠을 자주 직면한다. 여러 어둠의 모습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어둠은 나의 이익과 효율을 위해 사람을 수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다. 스스로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얼마 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나의 모습을 몰랐다면 마음이 더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순간순간 올라오는 마음들의 나를 괴롭힌다.
물론, 나쁜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들이 결코 나만을 위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을 위한 일일 때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자체가 사람을 ‘너’ 보다는 ‘그것’으로 바라보고 있는 일임을 나는 안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희생이나 노력을 위해 그들이 필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요즘 나는 ‘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어떻게 하면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다.
이런 고민으로 가득한 나날들을 보내던 중 마르틴 부버를 만났다. 삶은 참 재미있다. 적절한 타이밍에 나의 삶에 여러 사람들을 선물로 보낸다. 그들을 통해 삶이 나에게 보내는 다양한 메시지를 알아차린다. 왜인지 부버의 말을 듣고 있으니 지난날의 나를 나무라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참을 꾸짖은 후에야 이제부터라도 잘하면 된다고 위로를 해주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무엇으로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가.’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낀다고 답할 것이다. 존재의 중심이 ‘나’가 된다. 정확히는 ‘나’ 밖에 없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 속에서 진정한 관계나 소통이 만들어지기란 쉽지 않다. 왜냐면 모든 사람들 자신만의 기준과 잣대로 삶을 살아가고 그것들을 토대로 관계를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만 남았을 때 모든 관계가 깨지는 경험을 한 적이 많다. ‘너’가 없다면 ‘나’로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호기롭게 ‘나’ 홀로 살아아겠다고 아등바등 애를 써왔던 걸지도 모른다.
부버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라고 이야기한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관계라는 의미다. 엄마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나듯 탄생에서부터 관계를 통해 생을 얻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만큼 삶은 '관계와 만남' 그 자체다. 그 속에서 '참된 만남'을 가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아니 그 전에 지금까지 나는 온전한 ‘나’였을까? 아니었다. 내가 나를 ‘나’라고 부르긴 했지만 그것은 ‘나’가 아니었다. 형체가 없는 ‘나’였다. 부버의 말대로라면 ‘나’는 ‘너’가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법인데, 나의 삶엔 ‘너’가 없었다. 온갖 ‘그것’으로 가득한 관계들 속에서 진짜 ‘나’를 서서히 잃어갔다. 물론 ‘그것’으로 가득한 삶을 사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어떤 면에선 오히려 편하고 가벼웠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진정성이라던지, 평안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부재했다. 사랑, 그래 사랑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사랑에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것’으로 가득한 관계에서 오는 ‘영원한 너’의 부재.
무관심과 개인주의가 날로 심해지는 요즘, 조금은 인격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관계들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행복이란 오직 ‘나-너’의 관계에서만 가능할 테니 말이다. 그래서 부버는 끊임없이 그런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나누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나’가 있기 위해서는 ‘너’가 필연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
‘나-너’에게 온 존재를 기울어야 비로소 인간답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래야만 우리가 꿈꾸는 ‘영원한 너’에게 갈 수 있다는 것.
내 안에 죽은 ‘나’를 다시 탄생시키기 위해 내 안에 죽은 ‘너’를 깨워본다.
사랑,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