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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Apr 01. 2024

산을 오른다는 것은

세 번째 한라산 등반

나의 첫 한라산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6학년으로 넘어가는 해 겨울이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반 운동화에 아이젠도 없이 산을 올랐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또 다른 세계로 놀러 가듯, 눈 꽃으로 가득한 나무를 흔들며 눈놀이를 하기도 하고 산을 오르내리는 어르신분들께 밝게 인사를 하며 초콜릿을 나눠 받기도 했다. 내려올 때는 미리 챙겨간 큰 포대자루를 타고 눈썰매를 타듯 내려왔다. 이 산이 얼마나 높은지, 앞으로 얼마나 힘든 길이 이어질지 모른 채 열정과 패기 하나로 마치 놀이동산이라고 착각이라도 한 듯, 그렇게 한라산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그때의 강렬한 기억은 십몇 년이 훌쩍 지난 오늘까지 우리에게 잊지 못할 명장면 중 하나다.


성인이 되고 언젠가는 꼭 다시 한번 한라산을 올라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스물세네 살쯤 홀로 두 번째 한라산을 올랐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어린 시절 그들과 함께 또 한 번의 한라산을 올랐다.


날씨가 안 좋진 않을까, 체력이 못 받쳐주는 건 아닐까 하는 여러 걱정을 잔뜩 짊어진 채,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산 길을 묵묵히 걸었다. 우리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걱정이 무색하게 이 자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맑은 하늘을 선물했다. 다행히도 어릴 적 꽤나 산을 탔던 그 경험들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우리는 제법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그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과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며.


산을 오른다는 것은 마치 다른 형태의 명상을 하는 것 같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과 내쉬는 호흡 한 번에 이렇게나 집중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살며시 불어오는 바람을 온 감각으로 느껴 본 적이 언제였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묵묵히 땅을 밟으며 정상을 향해 오르는 일.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에 온전히 집중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산을 탄다는 것은 그 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스스로가 온전히 짊어지고 걸어가야 하는 삶이라는 여정과 닮아있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오르막을 오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만나는 내리막길. 그 찰나의 순간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인간의 얄팍함을 느낀다.


햇살의 재촉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눈들 다시로 살짝 피어난 새싹을 보며 겨울과 봄 사이, 계절의 변화가 오롯이 담겨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본다.


손에 닿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정상에서의 희열과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서로에게 박수를 보낸다. 혼자였다면 해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이렇게 산을 통해 삶을 배운다. 자연은 오늘만 산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어쩌면 산을 오른다는 것은 완벽히 현존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해냈다. 우리.”

“그러게, 대견하다. 내 다리.”

“그래도 우리 다음 산은 조금만 신중해지자.”

“가을 산..... 어때?”

“좋은데?”

“조금 완만한 산으로 가자.”

 

근육통으로 가득한 온몸을 느끼며, 우린 다음 산을 생각했다. 다시 한번 산의 매력에 빠진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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