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녕, 친구.

by 나린

[친구 親舊 :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친구'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삶은 늘 무언가와 이별한다. 영원한 관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어릴 시절 기억 속에 있거나, 최근까지 가까웠던 누군가를 떠올리면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증이 생기기도 한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라 원망하고 싶은 마음보다는 좋았던 기억을 더 추억하고 싶어 진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걸까? 일회성이고 소모적인 관계들이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제대로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는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제대로’의 정의는 뭘까? '가깝다'라는 건 또 뭘까?


우리는 ‘진짜’ 친구였을까?

우리에겐 꽤나 불편한 질문이 아닐 수가 없다. 이런 질문들은 깊은 수렁에 빠진듯한 허탈감을 불러온다. 정말 ‘이익’을 배제한 ‘순수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 걸까? 한 때 영원할 것 같았던 관계도 여러 이해관계가 얽히다 보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 그것을 알고있음에도 우린 늘 마음의 공간을 내어준다. 기대감은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그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이란 참으로 나약한 존재라,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우리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아주 가깝다고 느껴지는 친구 사이에도 공기를 타고 흐르는 어색한 침묵과 시선이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린 서로 느끼고,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인 셈이다.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없지만 우린 안다. 서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 사이를 더 진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과정이거나 그 반대로 서서히 멀어지는 과정일 수도 있다. 숱한 삐걱거림을 아무렇지 않게 넘기다가도 아주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다.


‘제대로’ 너의 감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친구일 수 있는 이유였으며, 함께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내가 생각한 '제대로'가 정말 진짜 진심을 담은 '제대로'였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너와 나 사이에 적당한 공간이 균열을 일으키는 순간. 어쩌면 이것은 순수함이 사라진 지금의 너와 내가 만든 거리일지도 모른다.


그저 지난 추억 속의 나를 토닥이며 마음을 다해, 오늘도 부디 좋은 날의 좋은 너이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

모습을 감춘 순수함을 그리워하며 딱 오늘 하루만 울기로 했다.


안녕. 안녕 나의 어린 시절, 나의 친구.

그렇게 고운 안녕을 하며 보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