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게 듣는 세계에서

조급한 시대의 경청에 대하여

by 나린
“세상에 다른 언어가 몇 개인 줄 아나? 우리 통역사 선생님.”

“7,100개가 넘는 걸로 아는데요.”

“땡! 아니야. 세상 모든 사람의 수만큼 있지.
사람들은 각자 다 자기 말을 해.
그러니까 서로 못 알아먹고 거꾸로 듣고 막말을 하지.”

『이 사랑 통역되나요?』 중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던 드라마에서, 유독 이 대사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처럼 나 역시 웃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수만큼 언어가 있다는 말은, 우리가 그만큼 자주 서로를 오해하며 산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같은 말을 듣고도 전혀 다른 장면을 떠올리고, 같은 이야기를 두고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는 일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늘 ‘듣고’ 있지만, 정작 ‘알아듣는’ 일에는 서툰 존재들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우리는 ‘잘’ 듣지 못한다.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연결을 놓친 채 각자의 세계에 머문다.


요즘의 대화 풍경을 떠올려보면, 많은 사람들이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기보다는 결론부터 알고 싶어 하는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요점, 핵심, 한 줄 요약.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이해하고, 빠르게 판단하고, 빠르게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는 데 익숙해졌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길어지면 마음이 조금씩 멀어졌고, 설명이 반복된다고 느껴지는 순간 집중력은 흐트러졌다. 마음속에서는 조급함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말하곤 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혹은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내 이야기 쪽으로 돌려버렸다. 분명 듣고는 있었지만, 사실은 듣고 있지 않았던 셈이다.


효율을 좋아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점점 타인의 서사를 견디지 못하게 된 건 아닐까.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얼마나 긴 길을 돌아 여기까지 왔는지는 잠시 뒤로 미뤄둔 채, 지금 당장 알아야 할 핵심만을 요구한다. 조언, 불평, 사족, 반복. 그런 것들은 쉽게 ‘불필요한 것’으로 분류된다. 나 역시 깔끔하고 단정한 대화를 선호했고, 그 취향은 어느새 사람의 말을 서둘러 지나쳐버리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인간에게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 가지 감각이 있다. 그중에서도 청각은 귀를 통해 공기의 진동을 받아들이고, 그 자극을 소리로 지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듣는다는 것이 정말 ‘귀’만의 일일까. 영화 속 대사에 마음이 움직이고, 음악을 들으며 울고,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건드려지는 순간들을 떠올리면, 듣는다는 건 단순한 기능 이상의 일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누군가의 마음의 결을 함께 건너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자주 ‘듣는 척’만 하고 있는지도 떠올리게 된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 우리는 분명 그 말을 듣고 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있다. 고개는 끄덕이지만, 반응은 늦어지고, 온도는 조금씩 식어간다. 말은 이어지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미 자리를 비운다. 그렇게 ‘닿지 못한 상태’의 대화가 만들어진다.


만약 소리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진동이고, 에너지의 파장이라면, 그 순간 우리가 내보내는 파장은 어떤 모양일까. 겉으로는 듣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은 비어 있는 상태. 그런 태도 앞에서 상대의 마음은 어떤 감각을 받게 될까. 말을 주고받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오가지 않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이 쌓이면, 관계는 점점 메말라갈 수밖에 없다.


소리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음악도, 웃음도,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일도 없는 세계. 얼마나 적막하고 삭막할까. 김춘수의 시 「꽃」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문장을 떠올리면, ‘부른다’는 건 결국 말을 건네는 일이고, 그 말은 누군가에게 닿을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부름은, 다른 한쪽의 ‘들음’을 만나야 비로소 완성된다. 한쪽의 부름이 다른 쪽의 응답을 만나는 순간, 관계는 연결되고 존재는 존중받는다.


그래서 듣는다는 건, 어쩌면 서로의 삶에 색을 더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반대로, 잘 듣지 못한다는 건 삶의 색을 조금씩 지워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그 색을 지우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보다 자주 모른 척하며 산다는 데 있다.


왜 우리는 타인의 긴 이야기를 오래 붙들고 있지 못할까. 가만히 돌아보면, 그건 이야기의 길이보다는 마음의 여유와 더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조급할 때, 하루가 버거울 때, 내 안이 어지러울 때, 우리는 유난히 남의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어진다. 타인의 긴 서사를 견디기 어려운 날은, 이상하게도 내 안의 긴 서사도 함께 감당하기 어려운 날이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내 마음속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생각과 감정들을 듣기에는, 스스로에게조차 늘 서두름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바깥의 말을 빌려 자기 말을 단단하게 만들려 한다. 이미 정리된 문장들, 그럴듯한 해석들, 안전한 표현들. 그것들을 가져다 쓰면, 적어도 덜 흔들리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정작 내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는 놓치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타인의 미묘한 변화를 꽤 잘 알아차린다. 표정의 작은 떨림, 말의 온도,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남는 침묵. 나 역시 그런 것들을 느끼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종종 모른 척한다. 못 느껴서가 아니라, 느끼고 싶지 않아서. 거기까지 가면 어쩐지 오래 머물러야 할 것 같고, 무엇인가를 내어줘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내어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다. 그래서 알아차리면서도 외면하고, 보면서도 지나친다. 때로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우리는 선택적으로 듣는다. 어떤 것은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흘려보낸다. 그리고 그 순간, 듣지 않은 것들만큼 연결은 느슨해진다. 그것은 타인과의 거리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거리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이상하게도 우리는 자기 마음에서도 함께 한 발 물러나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선택적으로 듣는다’는 건 어떤 것이 필요 없어서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에 더 가깝다. 우리가 귀를 닫는 이야기들 속에는 대개 건드리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 콤플렉스, 약한 지점, 애써 덮어두고 살아온 마음들. 그런 것들이 건드려질 것 같은 순간, 우리는 본능처럼 귀를 닫는다. 그것은 타인의 이야기에서 물러나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일이기도 하다.


조금 더 솔직해지면, 많은 사람들은 결국 자기가 중심이 되고 싶어 한다. 듣기보다는, 들어줬으면 한다. “들어줘”라기보다는, “알아줘”에 더 가까운 마음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세상에 계속 내 이야기를 건네면서,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여 주기를 기다렸던 시간들. 그런데 그 마음은 자주 허공의 메아리처럼 돌아왔다. 아마도 너무 한쪽으로만 손을 내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귀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 균형이 조금만 어긋나도 대화는 쉽게 독백이 되고, 관계는 서서히 멀어진다. 우리가 원하던 ‘알아줌’이 자주 도착하지 않는 이유도, 어쩌면 그 균형을 먼저 놓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듣는다는 건 귀로 소리를 받아들이는 일이라기보다, ‘잘 바라보는 일’에 더 가깝지 않을까. 다정한 시선으로 누군가를 바라볼 때, 말도 조금 더 잘 들리는 것처럼. 그래서 자신을 돌보는 일의 시작이, ‘자기 자신에게 먼저 다정해지는 것’이라는 말로 건네지는 건 아닐까. 연결은 혼자 만들 수 없고, 다정함도 혼자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잘 듣는다는 건, 다정함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깊은 형태의 연결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과연 충분히 다정했을까. 다정하다는 말을 쉽게 쓰면서, 실제로는 시간을 내주지 않았고, 머물러주지 않았고, 기다려주지 않았던 건 아닐까. 다정함으로 포장된 조급함과 자기중심성으로 관계를 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나는, 아주 작은 연습을 해본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길어질 때, 결론부터 묻고 싶어지는 마음을 잠시 미뤄본다. 반복처럼 들리는 말 앞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시 하는 이유가 있겠지” 하고 한 번 더 기다려본다. 내 이야기로 넘어가고 싶어질 때면, 아직은 상대의 시간이라는 걸 인정해본다. 요약보다 마음을 먼저 묻고, 결론보다 표정을 먼저 바라보려고 애쓴다. 여전히 완벽하게 잘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내가 언제 ‘듣지 않으려고’ 하는지를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다.


결국 듣는다는 건, 이해의 기술이기 전에 태도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세계 안으로 잠시 들어가 앉아 있을 수 있는 용기, 내 안의 소리를 서두르지 않고 함께 들어주는 용기, 그리고 기꺼이 열린 마음으로 연결될 용기.


사람의 수만큼 언어가 있는 이 세계에서, 적어도 몇 개의 언어와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따뜻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주고받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오래 외면해왔던 언어, 나 자신의 언어와도 조금 더 다정하게 다시 말을 걸어보고 싶어진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야 결국,

타인과 이 세상과 조금 더 단단하게 연결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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