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효율이 폭로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지금 생산성을 숭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명상 앱을 켜고, 독서 15분을 채우고, 오늘의 할 일 목록을 작성하고, 그 모든 것을 기록한다. 루틴의 기록, 성장의 기록, 자기계발의 기록. 심지어 일기조차 '생산적으로' 써야 한다는 압박이 존재하는 세계.
그러나 나는, 가장 쓸모없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글쓰기를 멈추었던 때가 있다.
펜을 내려놓은 것도 아니었다. 노트를 덮은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 그냥,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새벽 두 시. 빈 페이지. 형광등이 꺼진 방 안에서 휴대폰 불빛만 얼굴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많은 말들이 엉켜서 하나도 빠져나오지 않았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나로부터 끊어지면 세계로부터도 끊어진다는 것을. 조용한 붕괴는 갑자기 오지 않는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미 오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썼다. 쓰고, 쓰고, 또 썼다.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정리하려 하지 않고, 그냥 썼다. 고통스러울 때도 썼고, 행복할 때도 썼다. 눈물이 종이를 번지게 해도 썼고, 손가락 끝이 얼어 있어도 썼다. 충동을 쏟아내기 위해 썼고, 죽고 싶을 때도 썼고, 행복에 벅차 눈물이 차오를 때도 썼다.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이토록 이 비효율적인 행위를 놓지 못하는가.
생각해 보면, 일기는 이 시대의 문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읽어줄 독자도 없고, 수익화할 수 없으며, 스펙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알고리즘에 최적화될 수도 없다. 완성도를 향해 달려가는 글이 아니라, 뒤엉키고 모순되고 부끄럽고 날것인 채로 남는 글. 어제 쓴 문장이 오늘 낯설어지고, 오늘 쓴 문장이 내일 부끄러워진다. 새로워졌다가 다시 낡아지는 것을 무수히 반복한다. 그럼에도 쓴다. 자기 검열을 내려놓고, 그저 쓸 뿐이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롤랑 바르트는 일기를 두고 "쓰는 행위 자체가 존재를 확인하는 행위"라고 했다. 살아있음을, 가장 강렬히 알게 해주는 행위. 소리 없이 가장 강력한 행위인 것이다.
쓰면서 알게 됐다. 쓰지 않으면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다는 것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 채 잠들어 있다는 것을. 쓰고 나서야 비로소, "아, 이게 슬픔이었구나. 이게 분노였구나. 이게 그냥 지쳐 있었던 거구나."
그렇게 글은 나보다 먼저 나를 안다.
그것이 이 비효율적인 행위의 정체다.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 더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한 발짝 물러서는 것. 가까이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윤곽들이, 거리를 두어야 비로소 형태를 드러내는 것. 나를 나로부터 한 발 물러서게 하는 것. 전체를 직면하게 하는 것.
우리는 지금 물러서는 법을 잊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바빠서, 너무 효율적이어야 해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속도만 빨라지는.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갈기갈기 찢고 또 찢었다. 심장 가장 깊은 곳까지 손을 집어넣어, 꺼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끄집어냈다. 그 누구보다 채찍질했고, 그 누구보다 보듬었다. 그것은 살기 위한 발악이었고, 어쩌면 도망이었다.
그러나 나는 늘 그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살아, 돌아왔다.
이상하게도. 매번.
죽고 싶었던 순간에도 나는 쓰고 싶었다. 기록하고 싶었다. 그것이 얼마나 지독한 삶에 대한 갈망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죽고 싶다는 말을 쓰면서도,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이 먼저 알았던 것이다. 아직 여기 있고 싶다는 것을.
그렇게 기록은 곧 나의 숨통이었다. 소란스러운 마음에 진정이 필요할 때, 흐려진 선택에 명확함이 필요할 때, 무기력함에 잡아먹혀 움직여야 할 때.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새벽에, 홀로 켜진 등불이었다. 단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은.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오래된 노트를 꺼내 읽다가 멈췄다. 그곳에는 내가 몰랐던, 혹은 잊고 있던 내가 있었다. 분노하고, 욕망하고,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나. 이미 지나간 고통임에도 종이 위에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는 나. 그 페이지에선 그 시절 새벽의 냄새가 났다. 차가운 공기와 커피가 식어가는 냄새가. 몸부림치던 치열함의 냄새가.
그때 알았다. 지독히도 이기적인 기록이 결국 타인을 향해 간다는 것을. 나만을 위한 언어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언어가 된다는 것을. 내가 새벽에 혼자 쥐어짜낸 그 문장들이, 누군가의 "나도 그랬어"가 된다는 것을. 글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치유하고 있음을.
이것이 글쓰기가 단순한 자기계발과 다른 이유다. 자기계발은 나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 한다. 그러나 기록은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 위해 한다. 더 나아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불완전한 나를 증언하는 것. 미지와도 같은 삶의 수수께끼를 마주하는 것. 불완전한 나를 기꺼이 탐험하는 것. 그리하여 흩어진 조각들을 모으는 것.
그렇게 그것은 한 사람의 연대기가 된다.
우리 시대는 여전히 묻는다.
그래서 그게 어디에 쓸모가 있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쓸모가 없다. 정말로.
그러나 그 누구보다 효율을 사랑하던 내가, 더 많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내달리던 인간이었음에도.
결국 나를 살린 건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생산성 없는 새벽이, 보잘것없던 날것의 문장이,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던 페이지가.
효율이 갉아먹은 자리를, 효율의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채웠다.
이것이 나의 쓸모없음의 연대기다.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한 글도 아니고,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한 기록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 썼다.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쓰고 또 썼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쓸모 있는 이유였다.
다시 쓴다. 밖으로 나가 걷는다. 돌아와서 또 쓴다.
손을 움직인다.
차갑고, 느리고, 불완전하게. 그러나 움직인다.
마음도 그렇게 움직인다.
삶의 애증 앞에서 기꺼이 무릎을 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