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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May 31. 2019

편지

일상 속 인문학


오래된 편지 상자를 열었다.
꼬깃꼬깃 공책을 찢어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쓴 편지부터, 알록달록한 편지지에 글자로 빼곡한 편지까지.
가까운 과거부터, 10년도 훨씬 더넘은 과거의 시간 모두 이 얇디얇은 종이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수십 개가 넘는 편지를 하나하나 읽고 있으니 '아, 내가 이런 편지도 받았었구나, 나의 과거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었구나, 우리는 서로에게 이렇게나 애틋했구나, 나에게 고마운 사람들의 이렇게나 많았구나. 그리고 내가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 또한 너무나도 많았구나.' 하는 다양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올라왔다.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한다는 말과 그립고 보고 싶을 거라는 말, 수고했고 사랑한다는 말. 입으로는 차마 전하지 못했던 넘치는 마음들을 모아서 종이 한 장에 눌러 담던 시절이 있었다.

편지는 비뚤삐뚤한 글씨와, 낯간지러운 단어들 속이 있는 애정과 눈물, 고뇌와 애환 같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감정들을 가장 진솔하게 담아낼 수 있는 도구다. 이게 바로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고, 우리가 편지를 쓰는 이유다. 넘치는 마음을 미처 입술로 담아내지 못해, 글의 힘을 빌려 조금이라도 더 진정성 있고 솔직하게 담아내고 싶은 거다.

어린 시절 부족한 글솜씨로 부모님께 편지를 쓰던 우리의 모습이 그랬고, 사랑하는 이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고백편지를 쓰던 우리의 모습이 그랬으며, 힘든 시절 자신의 아픔을 편지에 담아내던 역사의 모습과, 잘 지내고 있다는 안부의 편지를 쓰던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랬다.

편지는 쓰는 이에게도 받은 이에게도 위로와 행복을 주는 힘이 있다. 그 힘이 너무나도 크고 무거워서 조금은 더디고 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울림이 있는 거다.

울컥. 하며 격해지는 감정을 애써 진정시켰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본지가 언제더라, 단편적이고 얕은 관계 속에 진솔함을 잃어간 건 아닌지, 마음속에 간직하기도 전에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말들에 지쳐가고 있는 건 아닌지.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가끔씩은 쉼표를 찍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만히 앉아서 종이 위에 마음을 써 내려가면, 나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그리고 마음을 쏟는 누군가에게 더 깊이 전달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오늘은, 진득하니 책상에 앉아 전하고 싶은 말들을 하염없이 써 내려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
오늘 하루는 그냥 편지를 써보았으면 한다.
받는 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대가 넘치게 받았던 마음을 가득 담아.


나는 이렇게 생각해, 어떤 무리에서 개성 있고,
역할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있다가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그 사람처럼 또 그 자리를 메워, 어떤 모양으로든 메워져.
또다시 각자의 자리에서 본인의 역할을 나눠서 할 거야.
짠 하고 나 타지는 않겠지만 누군가가 그렇게 될 거야.
우린 그렇게 서로 함께 사는 거야.

그래서 나는 당신의 앞 날을 축복하고 응원해.
함께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
당신의 열정을 알기에 우리 모두 당신의 마지막을
함께 축복하며 떠나보낼 수 있는 거야.
난 결코 마지막이 아니라고 생각해.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이니까.

나는 당신으로 인해 마음을 다잡고,
인생이 달라질 수 있었어.
아니 우리 모두 그럴 수 있었어.
그러니 늘 지금처럼 힘 있는 사람이 되어줘.
나도 누군가에게 당신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저 고마워. 아주 많이.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해.

-2011년 어느 날의 편지.
 
그 날은, 우리들의 마지막이었고, 나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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