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경험 통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xperiencer May 12. 2023

엄마의 첫 사업 성공을 통해 용기를 얻다

엄마의 딸로 얻은 인생의 인사이트

나는 이란성 쌍둥이로 쌍둥이 남자 동생과 막내 여동생까지 동생을 2명이나 둬서 항상 누가 동생들 좀 데려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는데, 유일하게 동생들과 사이가 좋아지는 경우는 엄마가 돈을 지어주며 동생들과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오라고 하는 날이었다. 몇 달에 한 번?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와 아빠가 싸우거나, 엄마가 아프거나, 아빠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겨 엄마가 정신이 없거나 했을 때 엄마가 3남매의 밥을 해결하기 위해 첫째인 나에게 돈을 지어준 것이었는데, 어렸을 땐 그게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 듯 동생 둘을 데리고 내가 사준다는 마음으로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오는 길엔 과자도 잔뜩 들고서… 자라는 동안 그런 일이 꽤 여러 번 있었는데 우리한테는 크게 영향이 없었다. 그 점은 지금도 부모님, 특히 엄마에게 감사한다. 아빠의 사업이 18번의 부도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엄마의 공이 크다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인간은 크게 3가지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는 모든 걸 부인하는 사람 (현재 상황을 꿈처럼 받아들여 변화된 상황을 바꾸려 하지 않고 숨는 사람들) 둘째는 남 탓을 하는 사람 (누구 때문이다, 상황이 이래서 그렇게 됐다, 등 이 또한 변화된 상황을 바꾸려 하기 보든, 잘못한 사람을 탓하기 급급하다) 마지막으로,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해결책을 찾는 사람이다.

엄마는 아빠가 18번의 부도를 맞을 때마다 좌절감에 빠진 아빠 대신의 집에서 살림만 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갑자기 나타나서 상황을 마무리했다. 필요한 서류를 준비하고 은행 계좌를 정리하고 부채를 갚고 돈을 빌리고… 그때 당시는 너무 어려서 엄마 차에 실려 여기저기 끌려다니느라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했는데 다 커서 또다시 벌어진 부도 상황에서 엄마가 여기저기 수습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지고 있던 대부분을 잃었던 큰 부도를 맞은 상황이라 우리 모두 다 같이 모든 것 부인하는 상황이었는데 유일하게 엄마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던 아파트를 팔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남아있는 재산을 정리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고 엄마한테 물어봤더니 본인도 당시에는 너무 무너져 내릴 것 같아 우리 가족이 다 같이 무너질 수는 없어 중심을 겨우 잡았다고 한다.


그때 내 나이 28살 어린 나이도 아니었는데 엄마는 왜 그럴까 매일 무시하던 마음이 쏙 들어가게,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몰랐다. 아마 엄마는 30년 가까이 세 남매를 키우고 아빠 사업을 뒷바라지하며 내면의 내공이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땐 엄마가 내가 보기에도 너무 이뻐서 왜 아빠랑 결혼했을까? 어린 마음에 생각했던 적이 많다.

사실 엄마는 아빠와 결혼한 가장 큰 이유가 자기 경력을 꾸준히 이어가기 위해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첫인사를 위해 시댁에 간 순간 엄마의 꿈은 와르르 무너졌다. 할머니는 태어나서 한 번도 두 발로 걸어 본 적이 없는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거동이 아예 불편한 건 아니었으나 지팡이 없인 이동이 불가한 상황이었고 그 때문인지 굉장히 강인하고 아들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한국 시어머니였다. 할머니는 당연하게 엄마가 결혼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집안일을 하길 원했고 당시 조금 이른 임신 중이었던 엄마도 본의 아니게 쌍둥이를 가지면서 회사를 자연스럽게 그만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우리를 낳고 본인도 복직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로 엄마는 일에 대한 욕심도 많았고 순진했다. 그 뒤로 정확히 16년 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엄마는 시댁살이 하며 할머니에게 시달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무렵 다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생 때 아빠 사업은 절정기를 맞아 사업 규모를 한참 키우던 중이었고, 부동산 사업을 위해 여러 회사가 모여있는 공장형 오피스텔 건물에 구내식당을 만들었다. 엄마는 아빠가 만든 구내식당을 직접 운영하며, 사모님에서 처음으로 사장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음식을 원체 잘해서 동네에서도 유명했었고 치킨부터 피자, 햄버거까지 직접 만들어 먹인 실력에도 불구하고 운영하는 것과 음식을 만드는 것은 많이 달랐는지 일 년은 진짜 엄청나게 힘들어했다. 음식이 맛이 있네 없게 부처 시작해서 오늘 메뉴는 왜 이러냐, 구내식당인데 깎아달라던지, 심지어 직원들도 말을 안 들어 갑자기 출근을 안 하고 보이콧하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일 년이 딱 지나고 엄마도 감을 잡았는지 점차 안정화가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사건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매출로만 본다면 초기 하루 100명이 겨우 올까 한 구내식당이 이젠 건물에 세입 한 거의 모든 회사가 정기권을 사고 밥을 먹으러 왔다. 그때의 엄마는 몸은 힘들어했지만 정말 행복해 보였다. 비록 고3이었던 쌍둥이 둘 뒷바라지를 외면하고 우리 둘 다 수능을 망쳤을 땐 후회하긴 했지만, 난 그때의 엄마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할 정도로 엄마는 구내식당 운영을 재밌어했다.


5년 정도 안정적으로 구내식당을 운영하다 보니 자연스레 부동산 가격이 올랐고 구내식당을 인수하고 싶어 하는 곳에서 꽤 연락이 왔다. 본래 아빠의 목적은 구내식당을 키워 몸값을 올리고 좋은 금액에 거래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망설임 없이 식당을 인수했다. 또 당시 회사를 더 키우려고 준비 중인 사업에 돈이 들어가 목돈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때 아빠는 지금까지 엄마의 원망을 듣는 가장 큰 실수 두 가지를 하는데 그중 한 가지가 엄마와 상의도 없이 하루아침에 구내식당을 판매한 것, 두 번째는 그 돈을 워터파크 사업에 투자한 것이다.


이 투자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후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사업은 점점 어려워지게 된다.

어쨌든 엄마가 구내식당을 하면서 처음으로 여자도 일을 할 수 있구나 사회생활을 하는구나를 직접 보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엄마를 본받아 학교를 휴학하고 1년간 인턴 생활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대학교 때 나는 지금과 다르게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사회생활은 못 하겠다고 생각해서 졸업이 다가오는 게 너무 두려웠는데 그런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자, 엄마가 “뭘 고민해, 한번 해보고 결정해, 이참에 회사 생활해 보고 해 볼 만하면 하는 거고, 아니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되지”를 듣고 왕 소심한 사람이 회사에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 경력은 내 인생에 전환점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빠의 실패담 인터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