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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Oct 19. 2022

Ep 39: 가용한 모든 자원을 걸다

인생의 첫 번째 대규모 투자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것일까? 하기 싫어서였을까? 원하던 토익 점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취업 포탈 서비스를 통해 지원 자격을 검색하여보니 웬만한 회사의 토익 커트라인은 700점 이상이었다. 예외 사항도 있었겠지만 토익 점수가 마련되어 있지 않으니 지원할 자격조차 없었던 것이다. 지원자격 700점이라는 말은 최소 800점에서 900점 이상은 획득해야 안정권이라는 것으로 인지됐다.


'큰일이다. 망했어! 정녕 학원을 다녀야만 하는가?'


 그렇게 큰 고민에 휩싸여 있던 당시, 때마침 '군 전역 장교 취업 박람회'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국내 유수의 대기업들이  전역 장교들을 대상으로 구인 중이었고, 일반 구직 사이트에서는 당연히 필요했던 토익 점수도 이곳에서는 예외 사항으로 토익 점수 없이도 지원이 가능했다. 그러나 내가 지원할만한 대다수의 포지션들은 영업 관련 직종이었고, 크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더운물, 찬물 가릴 처지는 아니었지만 사회가 원하는 방향대로 돈을 벌고 세금을 내며 이끌려 다니기는 싫었던 듯싶다. 이름만 대도 알만한 생활 용품 대기업에 입사지원을 해서 직무 적성 평가, 면접 등을 통과하였지만 최종 면접으로 이상한 술 면접을 진행하면서 저질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팀장 및 팀원들을 보고 있자니 한심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저들과 어울리면 나도 언젠가는 저들처럼 되리라.'


 사회에서의 첫걸음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쫓기듯 진행하던 모든 입사 프로세스를 중지하고, 마음속 깊이 간직만 해왔던 어학연수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더 좋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서였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시도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해봐야지!'


 곧바로 어학원에 방문해서 상담을 받아보니, 내 형평상 비용적인 측면에서 호주라는 나라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한국은 미국 영어를 최우선으로 치부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하였지만,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가기에는 금전적 부담이 너무나도 컸다. 어차피 영어로 대화만 통하면 된다는 심산이었기 때문에 나에게 어학연수를 진행할 나라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학원에 문의하여 보니 11개월 어학연수 과정으로 입학하는 비용이 2007년 당시 천만 원이 조금 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생활비까지 얼추 계산하여보니 아껴서 쓰더라도 약 3천만 원이라는 큰 지출이 발생될 예정이었다.


 종잣돈을 지출하려고 보니 소위 임관 후 처음 받았던 봉급이 생각났다. 80만 원 언저리의 낮은 봉급을 바라보며 한 숨을 크게 내쉬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났다. 백만 원도 넘기지 못하는 봉급으로는 2년 4개월을 근무해도 큰 목돈을 만들어 나오기는 글렀구나라고 좌절했었다. 하지만 봉급은 자대 배치를 받자마자 백만 원 초중반으로 금방 올랐고, 재테크에 심취해있던 나는 소중한 휴가 때마다 반나절 이상을 은행에서 살다시피 며 괜찮은 투자 수단 연구에 몰두하였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일반 창구가 아니라 2층 전문 상담 창구에 자리를 잡고서는 금융 동향이나 투자에 대한 상담을 받기 일쑤였는데, 친절한 은행 상담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꽤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 덕분에 2005년 당시에는 생소했던 펀드라는 것을 남들보다 앞서서 알게 되었고, 유망해 보이는 운용사 2곳에 30만 원씩 총 60만 원을 2년 동안 납입하였다. 운이 좋게도 전역 후 수익률은 100%를 넘고 있었고, 그 덕에 전역할 시점에는 얼추 3천만 원 가까이되는 큰돈을 모을 수 있었다. 펀드가 입소문이 돌면서 유행하기 2년 전에 가입했다가 해지했으니, 개인적으로는 정말 탁월했던 투자로 기억되고 있다. 보유하고 있던 자금과 어학연수 예상 지출 총액의 합이 비슷하게 맞아떨어지니 무언가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연수를 가서 일을 할 생각은 1도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출하게 됐던 어마어마한 액수에 사기라도 당할까 봐 가슴이 콩알만 해졌다. 불안한 마음에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 떨림은 이내 도전한다는 것에 대한 두근거림으로 치환됐다. 모아놓았던 목돈을 모두 사용하게 되는 상황인 만큼 나의 어학연수 프로젝트는 그 어느 때보다 절실했다. 실패하면 안 됐기 때문에 정신 무장부터 남달랐고, 준비 또한 완벽을 기했다. 호주와 관련된 책을 한 권 사고 새벽 영어 회화 학원을 등록했다. 학원을 마치면 곧장 헬스장으로 직행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오전에 배웠던 영어를 복습하고 반복 학습하였다. 중간중간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공포심으로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불안하였지만 빼어 든 칼로 무라도 베어낼 심산으로 뚝심 있게 진행하였다.


 그렇게 4개월 남짓의 짧지만 굵었던 준비 과정을 마친 후, 2007월 11월 어학원을 통해 학생 비자를 수속하였다. 처음에는 모든 과정이 예상대로 순조로워 보였다. 그렇지만 나의 인생은 순조로운 것들은 싫어한다는 것을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어학원장이 다급하게 전화를 해왔다.


"네, JJ 씨 저 어학원장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그간 잘 지내셨나요?"
"네, 저는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무언가 싸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게, 큰 문제는 아니고요. 잔고 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런 말씀은 없으셨던 걸로 아는데요?"
"아니, 제가 깜빡하고 말씀을 못 드렸는데, 호주에 학생비자로 체류하시려면 한국 돈으로 3,000 만원 이상의 잔고 증명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죠?"
"음.. 뭐라고 설명드려야 할까요? 호주라는 나라에서는 유학생의 자국 소비를 증진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비자 발급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혹시 오늘 내로 잔고 증명 가능하실까요?"
"어학연수 비용 등을 결제하고 나면, 돈이 턱없이 부족할 텐데요? 잔고 증명서를 먼저 제출하고 난 뒤에 어학 연수비를 결제해도 될까요?"
"예, 그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럼 제가 부모님께 여쭤보고 오늘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그럼 오늘 내로 빠른 연락 부탁드릴게요. 그럼 수고하세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일단 바쁜 대로 부모님께 전후 사정을 설명드렸다.


"아버지, 통장 잔고만 증명하면 되니까 천만 원 정도만 이체해주실 수 있나요? 증명서 떼고 나면 바로 돌려드릴게요."
"아들 미안한데 그렇게 큰돈은 우리 집에 없단다."
"아니, 천만 원이 없어요? 제가 돈 빌려달란 말씀드린 적도 없잖아요. 그리고 돈을 빌리는 것도 아니고, 잔고 증명만 떼고 나면 바로 돌려드릴 거란 말이에요!"
"그래, 무슨 말인지는 이해하는데, 마이너스 통장만 사용하고 있어서 모아놓은 돈이 없단다.. 미안하다.."
"아니, 제가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제 돈으로 제가 해외 가서 배우겠다는데 집이 가난해서 돈이 없다고 어학연수 하나도 제대로 못 가네요?!!!"
"미안하다...."
"........"


 속상한 마음에 화를 참지 못하고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로부터 억눌려 지내왔던 분노가 분출했던 것이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지만 짜증나는 상황의 탓을 아버지에게 전가하고 싶었다. 잠시 깜빡하며 지내고 있었다. 버는 족족 외식하고 쇼핑하며 지내는 우리 집이 중산층인 줄로만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억울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가슴에 큰 상처를 드리는 말을 했다. 그냥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고 싶었다. 돈이 없으면 어학연수도 못 가는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한탄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인생이 걸린 문제였던 만큼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었다.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할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친구들과는 돈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나의 철칙을 어기기 싫었다. 아니, 나의 처절한 상황을 공유하기가 싫었을지도..


 실오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서울에 살고 있는 누나에게 연락을 했다. 평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번다고 자랑하던 누나였기에 염치 불구하고 생전 처음으로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누나?....."
"응~ 우리 JJ 무슨 일로 전화했옹?"
"그게 다름이 아니라 진짜 미안한데...."


 나의 전후 상황을 설명한 후 누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JJ야, 누나가 씀씀이가 커서 돈을 많이 못 모아놨는데 어쩌지?"
"아.. 그렇구나.. 됐어! 고마워! 내가 알아서 할게! 이런 걸로 연락해서 미안해!"
"음, 근데 내가 녹십자에 비과세 보험 들어놓은 금액이 있는데, 거기서 담보 대출 가능할 수도?"
"그럼 대출 이자는 내가 갚아줄 테니까 잠시 이체 가능할까?"
"그래! 그렇게 해보자!"


 실낙 같은 희망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히 시내에 위치한 녹십자 센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납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대출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또다시 검은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졌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아무리 혈연관계이시더라도 본인을 제외한 타인의 인출은 불가합니다."
"아니, 여기요! 전화 바꿔드릴게요!"
"전화상으로는 불가하고요. 반드시 대면 방문하셔야 가능합니다."
"........ 감사합니다........."


 처절하게 몸부림칠수록 무언가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 속으로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돈 천만 원 때문에 인생의 모든 진로를 재수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깊은 좌절감은 나를 살아있는 좀비로 만들었다. 터덜터덜 넋 나간 사람인 것 마냥 아무 생각 없이 집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어학연수를 위해 미리 사두었던 MP3, 전자 사전, 타거스 백팩, 노트북 그리고 비행기 표등이 원수처럼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통장 잔고를 미리 뽑아놓을걸.. 어학원장은 무슨 일처리를 이딴 식으로 한담?'
'제대로 못 알아보고 진행한 내 잘못이지.. 누구를 탓하랴..'
'포기해야 하는 걸까?'
'뭐 해 먹고살지?'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땅거미가 몰려오며 어학원장과 약속했던 오늘은 저물어갔다. 힘겹게 어학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저 JJ입니다!"
"네! 어떻게 잘 해결하셨나요?"
"생각보다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죄송하지만 어학연수를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내로 잔고 증명서를 제출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네요."
"아이고! 뭘 포기한다고 그러세요? 친척이나 친구들한테 연락이라도 해보시죠?"
"그냥 지인들과는 돈거래를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취소 부탁드립니다."
"몇 개월을 준비하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하세요?"


 그때 당시 마음 같아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어학원장에게라도 잠시 이체했다가 바로 돌려드리겠다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럼 혹시, 다른 은행에 모아둔 돈은 없나요?"
"중학교 때부터 모아두었던 청약저축이 있기는 한데, 여전히 잔고 증명이 부족합니다. 다 합쳐도 2,800 만원 정도밖에 안 될 거예요...."
"어디 보자, 지금 호주 환율이 780원 정도 하니깐 2,400 만원 이상만 있으면 되긴 하는데, 안전하게 비자를 발급받으려면 3천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거였어요."
"아.. 그런가요?"
"네.. 그럼 오늘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까지 금액을 최대한 끌어모아서 잔고 증명서 보내주세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날, 나는 중학교 때부터 가입했던 청약저축을 해지한 후 2,800만 원 상당의 잔고 증명서를 어학원장에게 제출했다. 이제는 결과를 기다리는 수밖에....




 억울하고 화가나서 어쩔 줄을 몰랐다. 무언가 해보려고 발버둥 칠수록 항상 무언가가 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하기사 2002년 중국 여행을 갈 때에도 군대를 안 다녀온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외여행을 나가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고작 중국 여행 4박 5일 가는데 집안 재산 증명서까지 제출했어야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전시 행정이 판을 치고 있던 시기였다.


 돈 많고 부유한 집안 자식들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외국 여행도 다니고, 유학길에도 올랐을 터인데,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은 그 장벽이 너무나도 높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그래서 부와 가난은 이런 식으로 또다시 대물림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돈이 없어서 안타까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돈이 부족해서 모든 일들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분개하며 고통스러워했던 20대 중반의 나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앞아른거린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조차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서 무슨 평등 사회를 외치고 나발이냐고 성질부리고 있던 나의 젊은 시절 말이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항상 우리들의 주변에 존재한다.
 
가용한 자원에 따라 해결 시간의 길고 짧음은 존재하겠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실행력과 의지력만 있다면,
해결 불가능한 문제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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