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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Oct 12. 2022

Ep 38: 전역 준비 중에 생긴 일

융통성 부리기 싫었던 사실 그대로의 평가

 장기 복무 지원을 포기했다고 할 지라도, 남은 군 생활 동안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흐느적거리고 귀찮아하며 안 좋은 모습을 부대원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사람은 항상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반복적인 일상에서 튀어나오는 나태한 마음과 잠도 못 자고 진행해야 하는 과도한 업무, 효율적이지 못한 일처리에 대한 염증이 나의 초심을 좀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나를 잠식시키게 하기는 싫었다. 전역 준비라도 할 심산으로 해커스 토익 파란 책과 빨간 책을 구매하고, 당직 근무를 설 때마다 틈틈이 토익 공부를 진행하였다. 대학교 영자 신문사 출신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영어를 잘하고는 싶었지만 영어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은 어려움이라는 새로운 감정으로 포장되었다. 그렇지만 피할 수는 없었다. 나의 결정으로 장기 복무를 포기하였으니 나의 언행에 대한 책임이라는 막중한 무게가 나의 두 어깨를 짓 누리기 시작했다. 냉혹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특출난 무언가가 필요했지만 남들이 하는 것만큼만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고, 지방대 학력으로 인해 이미 뒤처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고학력 고스펙의 대중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남다는 전략이 필요했지만, 당장은 그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일단 스펙을 맞춰가는 것부터 생각했다.


'취업을 하기 위해 토익 900점 이상을 받을 수 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그 점수를 획득하기 위해 무언가를 했어야 했지만, 위수 지역으로 군대에 발이 묶여있으니 거금을 들여가며 토익 고득점 비결을 가르쳐주는 수도권 학원에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토익이라는 것이 영어 구사력을 보기 위한 시험일 텐데,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시험으로만 전락한 현 상황이 개탄스러웠다. 그렇다고 시험 점수가 없으면 취업 전선에 빨간불이 켜질 것이 자명한 상황이다 보니, 상황이 불만족스럽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보기 싫은 토익책을 부여잡으며 첫 시험을 응시했다. 토익 시험에 대한 지식이나 팁은 전무한 상태였으며, 단지 나의 토익 점수 정도를 점검하기 위한 처사였다. 과감히 휴가를 신청하고 접수한 토익 시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뭐, 처음 시험 보면 신발 사이즈만큼 점수가 나온다고 하던데, 그래도 고등학교 때 영어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니었으니 그 이상은 나오겠지..'


 무슨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고사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L/C를 푼 이후에 R/C를 푸는 순서였는데, 고사장 내부는 리스닝 테스트를 하는 내내 부스럭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뭘 저리도 시험지를 왔다 갔다 하는 거야? 정신 사납게 시리....'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한 문제를 놓쳤다. 초보적인 실수였다. 과감히 포기하고 다음 문제로 넘어갔어야 했는데 전에 놓친 문제에 신경을 쓰다 보니, 당황한 나머지 줄줄이 비엔나식으로 실수를 반복하며 속으로 '망했다!'라는 탄성만 연신 내뱉고 있었다. 찝찝한 기분을 채 풀지도 못한 채 R/C시험으로 넘어갔는데, 단어의 뜻을 몰라서 읽은 문장을 읽고 또 읽어가며 끙끙 앓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무심할 정도로 시원시원하게 시험지를 넘겨가며 가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들의 월등한 실력과 분위기에 압도된 나머지 마인드 컨트롤에 실패하고 혼자 나자빠져 도망가고 싶은 마음으로 리딩 테스트의 절반 정도를 풀고 있는 도중에, 벌써 시험 시간 종료라는 감독관의 호령을 듣게 됐다.


'망했네. 망했어. 쉽지 않네. 이러다가 취업도 못하겠네....'
'한국어를 사용하는 직장에서 영어를 도대체 왜 잘해야 하는 거야?!'
'환장하겠네.. 장기 지원을 포기하지 말았어야 했나? 어쩌지?'


 온갖 암울한 감정이 내 몸을 사로잡았고, 그 걱정스러움으로 인하여 아버지가 하신 저주의 말이 떠올랐다.


"너 장기 지원 포기한 거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거야!"


 귓속에 맴도는 그 말이 실현될까 봐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 젠장! 토익 시험 본다고 휴가까지 내고 나왔는데, 이게 뭔 창피람?'
'인생 쉽지 않네! 쉽지 않아!'


 그렇게 한탄해가며 부대로 복귀했는데, 모두들 내 점수를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아직 점수 채점 중일 거라서 점수를 모른다고 둘러댔지만, 추후 인터넷으로 점수를 확인한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부끄러움에 홀로 고개를 푹 떨구었다.


'990점 만점에 250점? 내 신발 사이즈도 안 나왔네?'


 앞날이 깜깜하고 막막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응시해보았지만 결과는 매번 처참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영어를 포기하고 싶은 심정으로 군 전역날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 나의 기분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행정관이 나를 호출하였다.


"소대장님! 무슨 전역 준비를 몇 개월 전부터 하고 그러세요? 부대 업무 소홀히 하는 거 아니에요?!"
"하하, 전역 준비라기보다는 부족한 공부를 하는 건데 쉽지는 않습니다. 업무엔 차질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아무튼, 잘 준비하시고! 여기 이 봉투 가져가서 작성 좀 해주세요!"
"이게 뭡니까?"
"부사관 직무 평가표예요! 부사관 장기 지원하는데 중요하니깐 잘 작성하신 후 다시 저한테 제출해주세요! 여기 다른 소대장님들 것도 좀 전해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서류 봉투에는 직속 상관인 소대장이 소대 부사관인 정찰 분대장의 직무 평가를 체크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1번은 매우 부정, 2번은 부정, 3번은 중간, 4번은 긍정, 5번은 매우 긍정으로 꽤 많은 항목들을 OMR 카드에 체크하도록 되어있었다. 대부분의 질문에 예의상 4번을 체크하였지만, 몇몇 항목에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소대 내 부사관이 본인의 업무를 잘 이해하고 숙지하고 있습니까?'
'전 하사는 본인의 업무 거부로 소대 내 모든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배우려는 의지도 없는데? 2번이라고 체크해야겠다!'
'피평가자는 발전 가능성이 크며 추후 육군에 반드시 필요한 인재입니까?'
'행정관 따까리 짓 이외에는 하는 일도 없고, 육군에 필요한 인재는 더더욱 아니지. 1번은 너무했으니, 이것도 2번으로!'


 그렇게 약간의 융통성만 반영한 평가서 작성을 마친 후 나의 선임 소대장이던 3 소대장님과 잠시 잡담을 나눴다.


"2 소대장! 어떻게 작성했어? 2소대 정찰 분대장 똥줄 좀 타겠는데?"
"그냥 뭐 가감 없이 사실대로 작성했습니다!"
"뭐? 하하하하하 그럼 다 1번 아니야? 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다 1번 하기는 눈치 보여서 정말 아닌 것 같은 문항 몇 개만 2번으로 했습니다!"
"진짜?! ㅋㅋㅋㅋ"
"소대장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난, 뭐.. 그냥 다 4번 아니면 5번 했지. 솔직히 3소대 정찰 분대장은 열심히 하는 편이잖아!"
"예! 3소대 정찰 분대장은 열심히 하는 건 인정입니다. 듣자 하니 부사관들은 모두 장기 지원하고 싶어 하던데, 2소대 정찰 분대장은 행정관 입김만 믿다가 울게 생겼습니다."
"그러게, 뭐 다 자업자득이지! 병사들도 뒤에서 찌질이라고 부를 정도면 말 다한 거지 뭐!"
"본인이 한 행동은 기억도 못하고, 제 원망만 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그렇게 작성 완료한 직무 평가표를 서류 봉투에 동봉한 후 행정관에게 전달하였는데, 잠시 후 행정관이 난리법석을 치며 상황실로 전화를 해댔다.


"2 소대장님! 어서 빨리 행정관실로 좀 와보세요!!!!"


'본인이 뭔데 매번 오라 가라야!'


 그렇게 짜증 난 표정으로 행정관실에 도착했는데, 전 소대 정찰 분대장들이 행정관실에 미리 자리하고 있었다. 싸늘한 눈길에 머쓱한 표정으로 행정관실에 들어가는데, 행정관이 의기양양하게 호통을 치기 시작했다.


"아니, 소대장님! 이게 뭡니까?"
"네?"
"2소대 정찰 분대장 직무 평가를 이렇게 해주면 어쩌라는 거냐고요?"
"전 있는 사실 그대로 평가했습니다?"
"아니, 이런 건 융통성 있게 못한 게 있었어도 잘했다고 해줘야 맞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어지간한 것들은 다 4번으로 체크했습니다?"
"지금 말장난하자고 제가 부른 줄 알아요? 어서 가서 다시 작성해 오세요!"
"근데 그걸 왜 뜯어보십니까?"
"아.. 그건.. 제출하기 전에 혹시 실수를 하신 건 없나 싶어서 확인차 열어봤어요!"
"행전관께서 수정하시는 건 아니겠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큰일 난일 있어요?"
"제가 다시 해와도 바뀔 건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최선이니 그냥 그렇게 제출해 주십시오!"
"아.. 진짜 말 안 통하네.. 저기 그럴 줄 알고 대장님 하고 면담 잡아놨으니까, 대장실에 방문 좀 해보세요!"


 행정관이 대장님께 이 사달을 해결해 달라고 미리 지원 요청을 해놓은 모양이었으나, 무서울 게 없었던 일 잘하는 말년 소대장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대장님, 행정관이 와보라고 해서 왔습니다!"
"어 그래! 2 소대장, 직무 평가서 그게 무슨 얘기야? 행정관이 난리를 치던데?"
"정찰 분대장이 소대 업무를 잘 진행하지 못해 도저히 잘 평가해줄 수 없는 몇 개 항목만 부정으로 체크한 것 때문에 저러는 것 같습니다."
"껄껄껄, 그.. 어지간하면 좋게 평가해주지 그랬어?"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정말 육군에 필요한 다른 부사관이 분별력 없는 평가서 때문에 탈락하는 위기를 겪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음.. 그 말도 맞긴 하지.. 그럼 그냥 소신껏 해! 행정관이 물어보면 내가 다독였다고 말은 하고!"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잡음을 만들어내며 여차저차 평가서를 제출한 후 나는 다시 민간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참 평범하지도 편안하지도 않았던 나의 군 생활은 나름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정찰 분대장에게는 미안한 감정이 들긴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방식대로의 게임에는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장교와 부사관 사이의 관계가 안 좋았을지라도 정찰 분대장이 배우려는 자세로 업무에 열심히 동참했다면, 분명 좋은 평가를 줬을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직속상관인 나의 업무 지시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행정관과 보급관의 따까리 업무만 진행했을 때, 이러한 상황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결국 정찰 분대장은 장기 복무에 탈락하고 만다. 전국을 다 뒤져봐도 매우 부정이나 부정으로 평가된 부사관은 예우상 찾아보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나의 후임 장교 소대장은 장교 부족으로 인하여 배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소대 업무에 문외한이며 지도할 능력도 없는 정찰 분대장이 소대장 업무를 공석 기간 동안 대행하게 되었다. 전역 직전 많은 것들을 아낌없이 가르쳐주고 나왔지만 가르쳐준 것들이 가르쳐 준다고 순식간에 배울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은 아니었다. 전역 후 씁쓸한 소식이 소대원들로부터 들려왔다. 만년 최우수 소대였던 나의 소대는 내가 가르쳐 놓았던 분대장들이 하나둘씩 전역하자 중심을 잃고, 날개 없는 추락을 반복했다고 한다. 전역하기 전부터 예견된 상황이기는 했지만 전역한 소대원들에게 비보를 전해 들으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리더의 역량에 따라 그 조직이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하는지를 단적으로 느끼게끔 해준 씁쓸한 사건이었다.


 부사관 텃세의 지존이었던 행정관은 대장님의 보복성 인사 발령으로 다른 부대에 전출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기존에 일궈 놓았던 모든 권위와 권력을 상실하고 주임원사 진급에도 실패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본인 잘난 맛에 살던 텃세 끝판왕의 몰락을 바라보며, 사람을 악한 마음으로 괴롭히면 안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었다. 모든 일들은 다 본인 하기 나름이라는 것을.


사회생활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

그것은

태도

태도만 좋아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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