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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04. 2022

Ep 18: 333

행운의 숫자라고 알려진 3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끔 해 준다고 하여도 기피하고 싶은 인생의 2가지 순간이 있다. 바로 지옥 같았던 고등학교 수험 생활과 장교로 임관하기 위해 훈련받았던 기간 그리고 그와 연계하여 군 생활을 했던 경험이다.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물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있겠지만, 그때 당시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은 아직까지도 나의 마음 한 편의 상흔으로 남아있다. 좋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지만 그 힘들었던 기억은 현재의 나조차도 다시 겪기 싫은 경험인가 보다.


 공부는 열심히 하지 않았지만, 학교 시간표에 따라 하루하루를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오전 07시 30분까지 등교를 하면 아침 보충 수업을 시작으로 밤 11시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마무리해야 학교에서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됐다. 밤 11시면 시내버스 운행도 중단되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나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 학원을 등록하여 학원차로 귀가. (새벽 2시쯤 귀가)

둘째, 독서실을 등록하여 자율 학습 후 귀가. (새벽 3시쯤 귀가)

셋째, 부모님께 매일 같이 하교 요청. (현실 가능성이 매우 낮음)


 주로 첫 번째, 두 번째 방법으로 귀가하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집에서 수면할 수 있는 시간이 매일 같이 3~4시간 정도밖에 안됐으니, 하루하루가 곤욕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 3학년 생은 여름 방학도 방학 보충수업으로 대체되니, 휴식의 그림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기 어려웠다. 유일한 휴일이었던 일요일에는 친구들과 미팅을 나가거나 축구를 했다. 하지만 수능이 가까워질수록 사교적인 모임은 잦아들고, 도서관 공부 모임 등으로 만남이 대체되었다. 공부가 하기 싫었던 나는 대충 책을 펼쳐놓고는 매점에 가서 라면을 사 먹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등, 공부를 소홀히 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인생에 도움도 안 되는 방대한 지식들을 연도별로 사건별로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가?'


 영어 교과서를 통째로 외워야 했고, 국어 책에 나오는 작가의 이름이며 작품 제목 그리고 그들의 의중을 기계처럼 외우고 또 외워야만 했다. 국사, 세계사 주요 사건과 연도들을 순서에 맞게 암기해야 했으며, 물리 공식과 수학 공식 등을 어디에다 써먹야 할지도 모른 체 나의 것으로 만들었어야 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나의 반항 섞인 염증을 쉽사리 가라 앉히지 못했고, 동기부여를 잃어버린 나는 그렇게 타당성을 고민하며 이유도 모르고 따라가야만 하는 교육 체계의 허점을 마음속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겨웠던 시간들도 흐르고 흘러 어느덧 수학 능력 시험일이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고사장은 집 인근의 한 중학교로 배정받게 되었는데, 같이 시험을 치르게 되는 다른 고등학교 학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부를 못하는 고등학교 출신들이었는데, 이들의 영향으로 화장실에서 피어오르는 구름과자는 화장실을 연기로 가득 채운 것으로도 모자라서 복도까지 아지랑이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핑크색으로 머리를 염색한 녀석에, 오토바이를 시끄럽게 몰아 대며 오는 녀석들까지 모두 시험에는 관심이 없는 훼방꾼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큰 시험을 앞두고 긴장한 탓에 몸 컨디션이 좋지 않아 감기약과 함께 우황청심환을 복용하고 고사장에 입장하게 됐다. 그 영향 때문에 두통이나 복통에는 시달리지 않았지만, 몽롱한 기분으로 시험을 치러야만 했다. 뜨끈뜨끈한 석유난로 부근에 앉으니 온몸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긴장감은 어느새 사라진 지 오래이고 나른함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1교시 언어 영역과 2교시 수리 영역 1은 큰 무리 없이 진행하였지만 3교시 수리 영역 2, 사탐 과탐 시간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화들짝 놀라서 깨어난 후, 서둘러 문제를 풀고 답안지에 마킹을 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아서 시간 안에 시험을 완료할 수 있었다. 속으로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마지막 4교시 외국어 영역 시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영어 듣기 평가가 먼저 시행되었는데, 내 오른쪽 뒷자리 앉은 녀석이 다리를 떨면서 책상에 걸어놓은 비닐봉지로 된 신발주머니를 건드는 소리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슥슥슥슥슥...."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는 나의 집중력을 흩트렸고, 열이 받은 나머지 한 문제를 놓치고, 그 문제를 놓친 압박감으로 인해 또 다른 문제를 못 듣고, 당황한 나머지 그다음 문제도 잘 듣지 못하고 마는 불상사를 겪게 됐다.


'저 씨부럴 것이 시험을 포기했으면 조용히나 있을 것이지, 왜 방해를 하고 지랄이지?'


 듣기 시험 중이어서 조용하라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뒤돌아서 째려볼 수도 없었다. 잘못 행동하면 부정행위로 퇴장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2명이나 되는 감독관이 이 상황을 캐치하지 못하고 그 녀석이 계속 다리를 흔들어대며 소음을 만들어내는 것을 방관한다는 것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음 문제로 넘어가기 전 영어 오디오가 잠시 멈춘 틈을 타서 나는 책상을 오른 주먹으로 강하게 내리쳤다. 경고의 메시지였다.


"쾅!"

"......"


 순간 시험장에는 정적이 감돌았고, 다행히 얼굴 모를 그 녀석도 놀랐는지 다리 떠는 것을 멈췄다. 감독관도 놀란 듯 눈치를 보며 내 주위를 말없이 배회했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듣기 시험을 계속 실시했다. 4교시 외국어 영역 시험을 마친 후에 얼굴도 모르는 다리 떨던 그놈을 잡아 족치려고 뒤를 쳐다봤는데,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쏜살같이 우르르 튀어 나가는 바람에 인생에 도움이 안 됐던 그놈은 그냥 나의 뇌리에만 남은 채로 그렇게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되어버렸다. 나중에 영어 듣기 평가를 채점해보니, 그 녀석이 방해해서 놓쳤던 3문제를 고스란히 틀렸던 것이 드러났다. 평소 영어 듣기 평가는 항상 만점이었는데, 인생 시험에서 그 쉬운 듣기 시험을 3문제나 틀려 버린 것이었다. 정작 영어 문제는 2개를 틀렸는데 그 쉬운 듣기를 3문제나 틀려서 속이 쓰려서 뒤틀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시험 성적은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에 담임 선생님을 통해 받게 되었는데, 그 점수는 400점 만점에 333점이었다. 나는 행운의 숫자 3이 3개나 있으니 좋은 징조이기를 기원하며 지원할 대학교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1~2점 차이로 앞으로의 인생이 결정되는 한국 교육의 현주소... 그 아쉬운 영어 듣기 3문항은 나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큰 아쉬움으로만 남지도 않는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멍청한 나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에 이끌려 지방대에 취업 잘 될 것이라는 학과로 특차 전형 지원을 했다. 모두 듣기에만 좋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단번에 대학에 합격해서 수시 비용은 아낄 수 있었다. 그 당시 IMF 여파로 가정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수도권 지역에 지원해 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던 나의 결심에 안타까움이 많이 남을 따름이다. 자취방비부터 대학 학자금까지 쓸데없는 걱정과 고민들은 나를 부모님 댁 근처에 머무는 방향 쪽으로 결심하게끔 만들었고, 나 역시 자기 합리화를 하며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쪽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지방 대학 나와도 전공만 잘 살리면 누구나 취업 잘 되고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그 당시 대통령께서 하셨던 말씀이고, 나는 바보처럼 그 말을 믿었다. 그 지방대라는 꼬리표는 사회생활을 하는 내내, 심지어는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다. 대학 간판은 내가 성년이 되어 나에게 낙인 되는 사회적 위치였음을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었더라면 아무리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았을 지라도 재수, 삼수, 혹은 사수, 오수까지도 각오를 했을 것이다. 지방대라는 꼬리표는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표출하기도 전에 타인의 편견에 잡힌 시선을 느끼게끔 해주었고, 이러한 시선은 수많은 서류 전형 탈락과 더불어 직장 내 진급 및 부서 이동 요청 시에도 암암리에 작용했음은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다 알 수 있었다. 내가 상대방보다 아무리 일을 잘하고 뛰어나더라도 국내 유수의 대학교나 명망 있는 해외 대학교를 나온 이들을 건너뛰는 것은 우리 사회나 회사 구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도 나의 면전에 대고 너는 지방대를 나왔기 때문에 취업도 잘 안되고, 진급도 잘 안 되는 거라고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못 읽을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나의 선택이었으니 후회는 없다. 하지만 부가 그렇게 대물림되듯, 가난도 이렇게 우리의 무지로부터 대물림될 수 있음을 너무나도 처절하게 느끼고 배웠다.


수많은 거짓을 마주해야 진실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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