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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n 17. 2022

Ep 17: 외나무다리

한 개의 통나무로 놓은 다리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야자(야간 자율학습의 줄임말)를 밤 10시까지 해서 고학년들에 비해 1시간 일찍 끝났다. 아마도 수영할 때 심장마비를 예방하기 위해 심장에서 먼 곳부터 차가운 물을 묻히는 것처럼, 야자를 점진적으로 늘리기 위한 전략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아무튼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가 밤 10시 30분 정도였으니,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10시가 되기 전부터 펼쳐놓았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가 10시가 되면 우르르 정문을 향해 돌진했다. 


 학교 정문 앞 정류장은 항상 만원이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30분 이상 되는 거리를 서서 가기는 싫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한 정거장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이 좋으면 막차 전 버스를 타는 것이고, 운이 나쁘면 막차를 타는 개념이었다. 그 덕에 항상 하굣길엔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녹이며 편안하게 귀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교문을 나설 때면 딱 봐도 건들건들하며 불량해 보이는 녀석이 항상 눈에 거슬렸다. 거의 대부분의 날들을 마주쳤는데, 그 녀석은 바닥에 연신 침을 찍찍 뱉어대며 건달이라도 되는 양 나를 이따금씩 째려보았다. 거기에 더해 미친놈처럼 가끔씩 소리도 질러댔다. 하루는 너무 기분이 나빠서 어김없이 교문 앞에서 어슬렁 거리던 그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욕을 지껄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우~씨발~!"

"야!"

"어우.. 뭐야? 나?"

"어, 그래 너."

"왜 그러냐?"


 그 녀석은 흠칫하며 내 쪽을 쳐다보았다.


"어쩌다 보니 내가 너랑 자주 지나쳤었는데, 너 나한테 불만 있냐? 나한테 욕한 거냐?"

"어? 난 어두워서 너 처음 보는데? 추워서 욕한 거야."

"그래?"

"어."

"그럼, 추운데 조심히 들어가라!"


 생각 외로 그 녀석은 저돌적이지 않았고, 그 이후로는 크게 욕을 하거나 신경에 거슬리는 행동을 내 앞에서 하지 않았다. 눈엣가시였던 녀석이 잠잠해지니 나의 하굣길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저 녀석은 이과로 지원 안 했겠지? 이과로 지원했더라도 같은 반 만은 면했으면 좋겠다.'


 내심 그 녀석에게 앙금이 남아있었던 나는 속으로 기원을 했지만 나의 운명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태껏 다이내믹하게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역동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계시였을까? 2학년으로 올라가 반 배정을 받았는데, 그 녀석이 떡하니 한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이런 젠장, 왜 저 새끼가 여기 있지? 아.. 짜증 나!!'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게시판에 붙어있던 좌석 배치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그 녀석이 내 짝꿍이었던 것이다. 눈을 비벼대며 보고 또다시 봐도 그 절망은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그 녀석 옆자리에 앉았다.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인사도 하기 싫었다.


"안녕.."

"어.. 그래.. 안녕.."


 그 녀석도 싫은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우리는 서로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었고, 그 자리가 불편했던 나머지 책가방만 던져놓고 다른 아이들과 대화를 하러 자리를 옮겼다.


"띵동~ 띵동~"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모두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와 그 녀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어책을 꺼내 놓고,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데, 그 녀석이 달그락 거리면서 어수선을 떤다. 당황한 듯 이리저리 찾아보더니 황급히 뛰쳐나가려다가 수업에 들어오시는 선생님을 확인하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교과서를 깜빡한 것이었다. 눈치가 보였는지, 나에게 책 좀 같이 보자는 말도 못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내키지는 않았지만 책을 슬며시 절반 정도 그 녀석 쪽으로 밀어줬다. 그 녀석은 흠칫 놀라며 말없이 고마운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수업이 무사히 끝나고 우리 사이의 한랭 전선은 어느새 온난 전선으로 그 모양새를 변화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감격한 듯 말을 걸어왔다.


"야, 아까는 당황했었는데 고맙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책을 빌리러 갈 수도 없었고.. 내가 진짜 이런 실수 잘 안 하는데.."

"고맙긴 뭘.. 당연한 거지.."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를 향해 미소 지으며 꽉 막혀있던 하수구가 뻥하고 뚫리 듯이 그동안의 악감정은 쏟아내고 진솔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너 진짜 재수 없었다. 근데 의외로 착해서 놀랐네?"

"ㅎㅎㅎ너도 진짜 재수 없었어. 껄렁껄렁하게 침을 찍찍 뱉기나 하고..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보자!"


마그네슘이 물을 만나 강렬히 반응하듯 우리의 대화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정말로 그것이 실현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놈만은 아니길 바랬는데, 되라는 복권은 당첨도 안되면서, 그놈이 내 짝꿍이라는 사실에 좌절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고 하늘을 원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장점을 많이 발견하게 됐고, 합도 제법 잘 맞는다는 것을 서로 느끼게 되었다. 그 녀석이 내 인생의 복권이었던 걸까?


 이렇게 이어진 우리의 교과서 인연은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한 친구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세상사 참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발생한다. 그 원수가 지금은 나의 절친이라니.. 알고 보면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된 이 사건은 인생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친구를 데려다주었다. 가끔은 원수를 대면하는 것도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나의 감정이 남의 감정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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