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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Jul 06. 2022

Ep 19: 귀찮음 Part 1

마음에 들지 않고 성가시다

 나는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대로 따라가 주는 사람이다. 단, 누구나 그렇듯이 그 말이 합당하거나 이치에 벗어나지 않았을 경우에만 그러하다. 대학 입학을 해서 가장 좋았던 점은 잠을 조금 더 오래 잘 수 있었던 것과 시간표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었던 것이 매우 컸다. 물론 수강 신청을 계획대로 잘 수립하기 위해서는 컴퓨터 너머에서 나와 같이 수강 신청을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학생들과 선착순 클릭 경쟁을 해야만 했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만 제외하면 말이다.


 평화롭고 자유로울 것만 같았던 대학 생활에도 적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호출과 기합이 시작된 것이다. 인사를 잘 안 한다는 같잖은 이유로 동기생들을 체육관 뒤편에 집합시켰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연신 시키더니 감흥이 떨어졌는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토끼뜀도 시켰다. 입고 있던 옷가지들과 헤어스타일은 금세 엉망이 되었고,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선배 한 명이 한참을 앞에서 주절거리다가 다른 선배의 자취방으로 우리들을 인솔했다. 온몸이 찝찝해서 샤워를 하고 쉬고 싶었지만, 선배들은 우리들의 불편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터벅터벅.."


 모두 짜증 나는 표정으로 도살장에라도 끌려가듯이 앞장서는 선배의 뒤를 따라서 허름한 철문이 딸린 한 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긴 복도 같은 곳을 지나서 자취방에 들어가 보니 특차 입시 때 피켓을 들고 취업이 잘되는 학과라며 광고를 해대던 나이 많은 선배가 편한 차림으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환하게 웃던 그때의 모습과는 달리 싸늘하게 굳어버린 얼굴로 무언가를 결심한 듯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동기생들은 바쁘게 손만 닦은 후 벽 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동그랗게 돌려 앉았다.


 잠시 후, 또 다른 무리의 선배들이 일명 '대또리'라고 불리는 소주 페트병을 양손 가득 사들고 나타났다. 실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 뒤에 안주를 들고 들어오는 또 다른 선배가 있었다. 참치 2캔에 추파춥스 5개.... 어느 정도 자리가 정돈되자 한 선배가 헛기침을 해대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너희들의 동기애 테스트를 하겠다. 여기 보이는 냉면 사발에 소주를 따를 텐데 앞사람들이 적게 마시면 마지막 사람이 다 마셔야 하니깐, 동기를 사랑한다면 마지막에 앉아있는 동기생을 생각하며 마실수 있도록!"


 얼차려로 시작된 군기 잡기는 술 먹이기로 2차전을 예고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두 똥 씹은 표정이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할 수는 없었다. 선배란 녀석들은 히히덕거리며 소주 페트를 냉면 사발에 콸콸콸 부어대기 시작했다. 술 잘 마신다고 자랑하던 녀석들은 뒷사람이 죽든 말든 한 모금을 열 모금 마시는 것처럼 연기하며 마셔댔고, 나의 차례가 당도했을 땐 소주가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다.


'여자애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싹수없는 자식들!!!'


 평소 물 마시는데 일가견이 있던 나는 빈속에 나의 위장으로 소주를 벌컥벌컥 때려 박기 시작했다. 절반 이상을 마신 후 다음 친구에게 넘겼고, 다행히도 마지막 남은 동기생은 마실 술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자 이것들이 마지막 동기생을 위한 술을 안 남겨줬다는 이유로 또다시 냉면 그릇을 소주로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빠른 페이스에 동기들은 순식간에 인사불성이 되고 있었다. 그 와중 술을 잘 못 마시는 동기생들이나 마시는 척 연기만 하는 녀석들은 머그컵을 들고 돌아다니며 집중 단속을 하는 선배로부터 따로 소주 머그컵 원샷 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술을 잘 못 마시던 한 여학생이 그 선배로부터 곤경에 처해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자! 여기 너희 동기생 중 한 명이 죽을 것 같다고 술을 못 마시겠다고 하는데, 동기애로 대신 마셔줄 사람 있으면 손을 들어봐라!"


 모두 고주망태가 돼서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손을 드는 친구들은 없었고, 서로 눈치만 보기에 바빴다.


"이놈들 동기애 봐라? 그럼 동기생이 죽든 말든 네가 다 마셔라! 동기가 사람 죽이네! 껄껄껄"


 속이 뒤집히고 하늘이 핑핑 돌았지만 유치한 짓거리에 곤경에 처한 동기생을 가만두고 볼 수 없었던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엥? 저놈 보게? 제법인걸?"

"제가 마시겠습니다!"

"이야 멋있다! 모두 박수!!!"


 흐느적흐느적 거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잔을 잡아 들고 마시려는 찰나, 소주를 바닥에 반 정도 흘려버렸다.


"어라? 이놈이 뺑끼를 쓰네?"

"다시 따라주세요!"

"피 같은 술을 버리면 쓰나? 표면 장력이 생길 때까지 따라줄 건데 이번에도 흘리면 두 잔이다?"

"예...."


 정신을 부여잡고 술잔을 잡고 있었으나 이미 통제를 잃어버린 몸을 원하는 대로 통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술을 흘리지 않기 위해 술을 미처 다 따르기도 전에 입을 갖다 대고 마시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흘린다면 소주잔이 사채처럼 불어나 버릴 것이라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알만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르르르륵...."

"많이 급했구나? 술 많으니깐 천천히 마셔!"


 술 고문을 하듯 그 선배는 조심스레 계속해서 술을 채워나갔다. 끊이지 않는 소주 무한 리필이라고나 할까? 본인들의 장난이 심했다고 생각은 했는지 주변 다른 선배들이 만류하자, 그 선배는 아쉬운 듯 술 따르기를 멈추고 인심 쓰는 척 뒤로 한발 물러섰다.


"녀석, 남자일세! 넌 나랑 밤새도록 술 마시자!"


 생각만 해도 토가 나왔지만 일단 눈앞에 일을 먼저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꿀꺽꿀꺽꿀꺽"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술을 벌컥벌컥 마셔대니, 선배들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하하호호하며 박수를 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악순환은 끝날 줄을 몰랐다. 술이 목까지 차서 못 마시는 동기생이 나오면 그 선배는 머그컵을 들고 다니며 흑기사를 외쳐대고 있었다. 두 번째 흑기사를 요청하자 첫 번째보다는 제법 많은 친구들이 손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정신을 잃어갔다. 술을 마셔도 필름이 절대 안 끊기는 나였지만 소주를 사발로 연신 들이켜다 보니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새벽녘에 속이 쓰려 눈을 떠보니, 동기생들이 여기저기 추풍낙엽처럼 쓰러져서 널브러져 있었다. 여자 동기생들은 다행히 기숙사나 집으로 귀가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한 여자 선배에게 다가가 집에 돌아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 여자 선배는 내 상태가 너무 안 좋고 밤이 늦었으니 자고 가라고 권유했지만, 나는 그 쓰레기 같은 곳에서 단 1초도 더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의 계속되는 요구에 조심히 돌아가라며 대문을 열어주었고, 나는 선배들에게 인사를 드린 후 홀로 대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나의 호흡기를 타고 넘어왔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마당 밖 낡은 쇠문을 지나가려는 찰나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토사물이 뿜어져 나왔다.


"웩~웩~우웩~"


 다행히 자취방과는 거리가 있어서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먹은 안주가 없으니 소주만 연신 뱉어냈다. 그렇게 그 선배 집 앞에 물 피자 한판을 선물하고는 외마디를 내뱉으며 새벽 택시를 고 집으로 향했다.


"씨발 새끼들...."




 나는 집단에 얽매여 나의 일상이 침범당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집단을 싸잡아 혼내는 문화는 선배들에게 후배들을 집합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을 터. 대학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무언가 잘한다는 것에 대한 후회와 염증을 강하게 느꼈다. 잘한다는 이유로 인해 강제적으로 남들보다 더 학과 생활에 참여했어야 했고, 심지어는 술을 잘 마신다는 이유로 술을 더 마셔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그냥 정신력으로 참고 견디는 것일 뿐. 나의 주량은 1병이지만 3병 이상 마시기를 권유하던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본인들이 선배들에게 조련당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악습을 반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모르는 것일까? 발전도 없고 앙금만 남음을....


 아무튼 얼차려를 잘 버티고, 술은 주는 대로 다 마시며, 축구도 제법 해서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배들의 부름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된 나의 대학 생활은 나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그러한 연유로 학과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힘이 없던 새내기는 선배들의 곤욕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불쌍한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못 마시고, 못 하는 척하는 게 정답이었을까? 선배 같지도 않은 선배들에 대한 반감으로 나는 그 흔한 "선배님! 밥 사주세요!", "선배님! 시험 족보 주세요!" 멘트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이런 나쁜 악습은 나로부터는 종료되었지만, 술을 못 마시는 척하면서 학과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던 일부 동기생들에 의해 반복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신입생들이 편안하게 잘 대해주는 나보다는 악습을 반복하며 후배들을 대하는 그들을 더 믿고 따랐다는 것이다. 어쩌면 후배들에겐 선택 사항이 없었을지도..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남들이 원하는 대로만 살기도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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