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후 휴식 - 52일 차 (2)
나는 T다.
MBTI가 유행하기 전에 초등학교때 해봤을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 후 회사를 다니면서 까지 그거 하난 바뀌지 않았던 거 같다.
(남편을 만나고 남편 한정 F이긴 하지만 다른 친구들에게 하는 거나 업무를 할 때도 기본 베이스는 여전히 T인 거 같다.)
초등학교 때는 그렇게도 쓰기 싫었던 일기를 남편을 만나도 매일매일이 소중해 잊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한두 줄씩이라도 쓰기 시작한 게 이제는 습관이 되어(습관이라 쓰고 사실은 어쩌면 약간의 강박) 하루도 빠지지 않고 쓴 게 이미 5년이 훌쩍 넘은 거 같다.
내 일기의 특징이라고 말하자면 내 일기는 사실 일기보다는 일지에 가깝다. 무슨 말이냐면 감정을 빼고 뭘 했는지 객관적인 한 일,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 처음부터 일기를 적기 시작한 이유는 내가 뭘 했는지 잊고 싶지 않아서였고, 뭘 했는지를 보면 어떤 감정이었는지 다 생각이 나고 원래 일기를 쓰는 걸 싫어했기에 최대한 짧게 적다 보니 그렇게 된 거 같기도 하다.
또 이렇게 적은 일기는 혹. 시. 나 유출? 이 되더라도 이불킥 할 일 없고 또 만약에 내가 경찰에 연루가 되는 일이 있더라도 정확히 어느 날에 뭘 했는지가 다 기록이 되어있으니 증거? 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 해서 시작된 거 같기도 하다.
근데 그래서인지 감정을 글로 남긴다는 게 쉽지도 않고 도움이 되지도 않는 거 같아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 같은데 문득 내가 쓰기 싫었던 일기를 자진해서 매일 쓰는 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거처럼 감정을 글로 남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브런치 글을 쓰는 것도 치유 과정을 기록하며 보고 싶었던 거지 딱히 더 딥한 감정까지 쓸 생각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겠지만 조금 전 밀리의 서재에서 첫 오디오 북을 들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고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 그걸 전달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고 생각해 왔지만, 어쩌면 지금 온 이 무기력함과 불안감 등등 부정적인 감정들을 겪어보면서 내가 감정이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한다는 생각 자체가 오만한 게 아니었나 또 그러한 점들 때문에 지금 이렇게나 힘들어하고 머리로는 안다고 말하면서도 실천이 안 되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전글에서 언급한 웹툰의 주인공은 언제나 척척 모든 걸 잘해왔고 그로 인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한순간에 그렇게 착착 올라가다 무너졌을 때 멘붕이 오고 어찌할 바 몰라하는 걸 보며 나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라 생각했지만 또 한편으론 나도 어느 정도 그런 과정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뭔가 지극히 사적인 너무 개인적인 것들을 인터넷에 쓴다는 게 한편으로 너무 사생활 노출 같기도 해서 이곳에 자세한 걸 안 적으려는 것도 있었는데 이제는 해볼까 싶다.
나는 항상 알아서 잘하는 첫째였다. 어려서부터 알아서 척척 잘했고 엄마는 입버릇처럼 너는 뭐든 잘해, 우린 너를 믿어, 나는 우리 딸이 알아서 다 잘하니 너무 좋아. 엄마 아빠는 언제나 니 뒤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했지만 나에겐 알아서 잘한다 언제나 뭐든 잘한다가 조금 더 강하게 남았던 게 아닐까 싶다. 부담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알아서 잘하니 엄마 아빠가 나에게 본인들이 생각하는 목표를 강요한 적도 없었고 말 그대로 내가 하고 싶은 걸 정하고 그걸 해내왔다. 나는 고집 세고, 내 건 내가 정하는 걸 좋아했고, 실제로 그걸 이루어 내는데 크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던 거 같다. 엄마의 너는 뭐든 잘해라는 마법 같은 말을 나도 믿고 있었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나에게 부담감이라는 걸 주지 않아 뭐가 안돼도 나는 스트레스받지 않고 언제나 내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내면서 정말 그렇게 평탄하고 순조로운 삶을 살아온 거 같다.
근데 그래서일까, 지금처럼 한번 무너지고 불안감이 시작되니 이걸 극복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거 같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고 어서 빨리 고치고 싶은데 인터넷에 보는 조언들 친구들에게 듣는 조언들 상담가에 듣는 조언들 모두 머릿속으로 아는데 실천이 안 되니 그게 또 더 힘들게 하고 악순환의 연속이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한 적 없었지만 엄마의 말대로 나는 항상 걱정 없이 잘 해내는 딸이었다. 1등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중학교 졸업할 때 마지막 기말고사에서 전교 10등도 해봤고, 초등학교 때 생각한 거처럼 하버드나 서울대를 간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학교도 세계 30-40위쯤 되는 곳이었고, 대학 시절 내내 연애가 해보고 싶었지만 썸과 짧은 연애 몇 번만 해서 내 인생에 첫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연애라 생각했지만 또 졸업 전에 지금의 남편을 만나 대학 마지막 기말고사가 끝난 지 2주 만에 결혼식도 하고, 취직도 막학년 2학기때 되어 시작하고 그 이후 두 번의 이직을 하며 할때마나 연봉도 훅훅 올려가며 너무나도 평탄한 삶을 살았다.
아무도 압박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평탄하게 흘러왔기에 이번에 이렇게 회사에서 처음으로 안 좋은 고과를 그것도 지금까지 나한테 항상 잘한다고 해온 상사에게 받았을 때의 감정은 뭐라 설명이 안된다. 월급 루팡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실 우리 업계 일이 야근이 많은데도 나는 야근을 별로 안 한 편이었다가 작년 이맘때쯤 원하던 부서로 옮기고 나서 정말 처음으로 야근도 많이 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일, 업무를 하며 성장한다고 느꼈고 야근하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았다. (물론 혼자 야근한 게 아니라 어차피 남편도 야근이 많아지면서 같이 했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올해 9월까지 내가 승진이 안되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라며 적어도 연봉은 최대치로 올리는데 자기가 힘써줄 거라던 작년의 매니저는 이제는 내가 지금 직급에서도 충분히 못하고 있다며 목표를 승진이 아닌 평타 치는 거로 하자고 하고 그 말에 지금까지 처음으로 이렇게 까지 내 몸을 갈아 넣어서 하던 야근은 의미가 없어지고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뭘 한 건가 하며 회의감까지 들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사실 우리 회사를 진작에 떠났어야 하는 걸 알고 있다. 연봉은 2-3년 동결이 되었었는데 사실 전회사에서 지금 회사로 올 때 연봉을 거의 40% 인상받아서 1-2년 연봉 동결이 됐을 때만 해도 나는 그래 회사가 어려우니까 하며 그래도 복지도 좋고 풀 재택이라는 점이 좋아 이직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많은 동료들이 지난 몇 년간 떠났고 일단 연봉은 지금 회사보다 훨씬 많이 주는 곳으로 간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엔 지금 회사보다 더 작은 회사로 간 동료들도 차고 넘친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구조조정 때 잘린 동료가 아마존 (여기서 워라밸 안 좋기로 유명한)으로 옮겼는데 우리 회사 보다 일이 쉽고 너무 만족스럽다고 했던 거다. 어쨌든 나는 회사가 별로라는 걸 알면서도 특히나 요즘 점점 사라지고 있는 재택이 가능한 회사들 때문에라도 그냥 지금 회사에서 팀을 옮기는 게 어쩌면 최선이라 생각을 했고 (지금 분야 말고 다른 부서에도 관심이 갔고 다른 직종으로 바꾸는 건 사실 다니던 회사 내에서 옮기는 게 제일 쉽다. 특히나 요즘처럼 얼어붙은 취직 시장에선) 그것만 생각하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게 엎어지고 나니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버텨 온 걸까.. 그렇게 힘들게 버틴 거라고 생각 안 해봤는데 막상 이렇게 멈추고 보니 마치 발톱이 빠진 것도 모른 체 달리다가 멈추고 나서야 모든 신체의 통증들이 한 번에 몰려와 걷기도 어려운 사람 마냥 한 번에 파도처럼 힘듦이 몰아쳐 왔다.
요 몇 주 동안 친구들과 더 대화를 하면서 확실하게 느낀 건 괜찮지 않은 나의 상태를 인정하는 게 가장 첫 번째 단계이고 또 절대 하면 안 되는 게 그전에 괜찮던 나의 상태로 뱌로 완전히 돌아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지라고 생각하며 더 멘붕이 오고, 이 정도는 당연히 해왔는데 이것도 못하는 내가 너무나도 낯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처럼 느꼈거나 느끼고 있고 온전히 쉬어가며 나를 치유해야 또다시 달릴 수 있을 텐데, 그리고 번아웃은 분명 장기 전이라고 하는데 자꾸 조급한 생각이 들며 나도 모르게 이직 자리를 자꾸 알아보는 걸 보면 어쩌면 나는 내가 이제 쫌 괜찮아져서 이직/구직을 시작할 거라고 하지만 한참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