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결심, 드디어 하다!

번아웃 후 휴식 - 87일 차

by Nana

어제 글을 쓰고 이상하게 잠을 설쳤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끝이 나지 않는 복직이나 퇴직이냐, 복직을 두고도 풀타임으로 하냐 파트타임으로 일단 3개월 돌아간다고 하고 지켜볼까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리에서 맴돌아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1시가 넘어서였을까 문득 회사 캘린더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냥 당장 복직하면 무슨 일이 듀일까 싶어 확인했는데 매니저가 내가 돌아올 예상 날짜에 원래 있던 1대 1 면담 시간을 1.5시간으로 길게 늘려 논건 발견했다. 매니저는 일단 내가 돌아가는 걸로 예상할 테니 뭐 내가 캐치업을 하기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잡아 놓는 게 놀랍지 않아서 지나치려다 문득 미팅 인바이트에 있는 첨부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 보는 파일은 아니고 우리가 가끔 사용하던 미팅 어젠다 파일이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는지 기억도 가물가물 한데 맨 위에 이번 주 월요일 날짜로 새로운 어젠다 내용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매니저는 내가 이번 주 월요일에 돌아오는 줄로 알았을 거다 내가 일주일 더 연장할 수 있다는 걸 지난주 끝날 쯤에야 알게 되었었으니)


초반 내용들은 뭐 나도 가끔 이메일 체크하면서 알게 됐던 내용들이었다. 물론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토픽정도는 무슨 얘기를 할지 내가 없는 동안 생긴 부서 내 변화들에 대한 내용인 거 같았고 점점 내려가며 약 두 페이지에 다다르는 어젠다를 보며 나는 결심하게 되었다.


이 회사로 돌아가지 않아야지.


많은 내용들이 있었지만 그중에 내 눈을 사로잡았던 건

저번달인지 이번 달에 하다가 자기가 커버 못한 부분을 마무리해달라는 부분과,

앞으로 몇 달 동안 당겨진 데드라인들

그리고 디벨롭먼트 플랜을 한 달 안에 끝내라는 것과

연말 홀리데이 동안 일을 해야 될 거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중에도 마지막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내가 절대 돌아가면 안 되겠다 싶었던 내용이었다.


갑작스럽게 내가 휴직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와 남편은 남편 쪽 가족을 보러 겸 늦은 신혼여행을 갈 겸 남편의 나라로 연말 휴가를 길게 가기로 하면서 오피셜 한 휴가 요청을 하기 전에 매니저에게도 귀띔을 해주었었다. 한국을 갈 때도 그렇고 우리는 메인 목적이 가족들과 조금이라도 더 보내는 거라 예를 들면 3주를 가면 2주는 진짜 휴가고 1주일은 그 나라에서 재택근무를 하면서 가족들과 시간 보내왔고 이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연말엔 회사 전체가 일주일 추가로 쉬기 때문에 개인 연차와 상관없이도 일주일 전체 휴가가 있어서 더 부담 없이 가는 연말 휴가였는데 갑자기 이 전체 휴가 기간에도 일을 해야 될 거라는 말이었다 (데드라인이 앞당겨지면서)


그리고 문제의 디벨롭먼트 플랜은 내가 몇 달에 걸쳐 스트레스받다가 결정적으로 번아웃이 오게 된 계기였는데 또 그걸 얘기하면서 한 달 안에 끝내라고 오자마자 푸시를 주려 한 것이다.


며칠 고민을 하면서 잠시나마 기대했었다.

혹시 이 모든 걱정들이 그저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었어서 오히려 내 머리 안에서 상상하며 쓸 때 없이 과하게 걱정/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닐까 하고. 매니저가 내 자리와 같은 포지션 공고를 냈지만 그게 혹시 드디어 내가 전부터 원하던 다른 부서에 자리가 나서 매니저가 그렇게 내 자리를 채울 포지션을 미리 오픈 한건 아닐까 하고.


어찌 보면 잘 됐다.

원래 어중간한 나쁜 놈은 미워하기도 애매하고 괜히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하고 미련이 남는 법인데

차라리 완전히 나쁜 놈이면 실컷 욕이나 하고 잊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 상대가 내가 한땐 정말 존경하고 닮고 싶었고 이런 사람이 내 매니저라 나는 너무 복 받았고 나도 언젠가 매니저가 된다면 이런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의 사람이었다는 점에서 참 씁쓸하다.


지금까지 해왔던 알바/회사를 통틀어서 지금 매니저와 가장 오래 일했고 나이도 가장 적게 차이 나서인지 친구처럼 때로는 내 커리어에서 한두 발자국 앞서있는 사람으로서 배우고 싶은 사람으로 내가 많이 의지 했나 보다.


언젠가 내게 매니저는 말했었다.

"회사는 회사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그러니까 회사에 충성하지도 말고 할 필요도 없어.

너한텐 네가 제일 중요하니까 너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선택해."


드라마에서 책에서 보던 내가 상상하는 일반적인 상사와는 다른 조언이어서였을까

나는 그 말을 2-3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하고 언제나 그렇게 생각하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직계를 내던지기 전까지 그 말을 실천하기는 어려웠다. 나한테 있어 매니저도 동료들도 모두 친구 같은 사람들이었고 함께 으쌰의쌰하며 같은 배를 탄 동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조금 손해 보는 거 같아도 어차피 같은 배 탄 마당에 서로 도우며 좋게 좋게 지내는 게 난 좋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많은 좋은 동료들이 회사를 떠나는걸 (자의든 타의든) 지켜보며 동료는 동료고 지속되는 친구가 되기는 어렵다는 걸 머리론 알고 있었다. 시절 인연이라 해도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정이 있었고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았기에 회사를 자의로 먼저 떠나는 선택을 하는 게 어려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복직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지고, 잠들기가 어렵고..

결정적으로 매니저가 쓴 미팅 어젠다를 보고 나니 이제 정말 내가 떠날 때가 되었는가 보다 싶다.


나중에 이 일을 되돌아봤을 때 기분 좋게 이 일이야 말로 천운이었다고 내 인생에 있어 큰 행운 중에 하나였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왜냐면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


그저 그렇게 적당히 나쁘지 않아서 더 오래 머물 뻔한 자리를 내가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계기가 되어주었고 이걸 계기로 훨씬 더 나은 기회가 올꺼같다. 항상 그래 왔듯이! 잘 되길 바라다가 안 됐을 때 속상한 일들도 있었지만 결국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좋은 기회가 항상 왔었다. 4년 전 지금 회사로 옮길 때처럼. 그러니까 이번에 이렇게 속 시끄럽게 한 이 일들도 결국은 내가 더 좋은 기회로 나가가기 위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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