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자령과 우이령 발가락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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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을 보거나 어떤 만남을 가질 때 가장 부러운 사람은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사람이다. 돈과 시간에 큰 구애 받지 않고 원하는 곳을 원하는 시간만큼 즐길 수 있는 여유란 내게 가장 큰 로망이다. 그래서 틈만 나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어딜 나다니고 쏘다니고 이것저것 구경하는 모임에는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일환으로 지지난 주 토요일에는 북한산 우이령을 넘었고, 지난 주는 대관령 옆 선자령 길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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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은 학교 동기들의 트래킹 모임과 함께 했다. 트래킹 모임의 장으로서 코스를 짜는 친구의 사전 안내가 자상하다. “우이령길은 사전 예약제이므로 사전 신청이 필요하고, 함께 움직여야 하므로 평소처럼 지각생 기다려 주지 않으며, 미리 답사해 본 결과 눈이 녹지 않은 길도 있으므로 아이젠이 있으면 구비하는 것이 좋겠다. 코스는 우이령 오봉 전망대에서 석굴암을 들렀다가 원점 회귀하는 것으로 하고, 뒷풀이는 두부전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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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은 도봉산과 북한산의 경계이자 서울 우이동과 경기도 양주시 교현리를 잇는 고개다. 내가 이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2000년께, 도봉동에 있는 설렁탕집 무수옥을 촬영할 때였다. 그때 무수옥의 오랜 단골 한 분이 인터뷰 중 이런 얘기를 했기 때문이다. “양주에서 나뭇짐을 지고 우이령을 넘어온 사람들이 나무 다 팔고 이 설렁탕 한 그릇 먹고 다시 넘어갔지.” 대로(大路)는 아니었다. 대동여지도에서도 이름 없는 오솔길 정도로 표기되고 있으니까. 그래도 해발 327미터 정도로 북한산과 도봉산의 험산준령 중에서는 팍팍한 길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의 발길은 끊임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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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령을 넘으며 가장 크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도봉산 오봉 능선이다. 높이가 660미터가 넘으니 우이령의 두 배로 높은 셈인데 다섯 개의 봉우리가 인공적으로 조성하기라도 한 듯 나란히 서서 우이령을 넘는 사람들을 굽어 보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원님의 절세미인 딸에게 장가들고 싶었던 총각 다섯 명에게 원님이 바윗돌을 들어 던져 그 힘을 입증하라고 하자 다섯 명 모두가 집채만한 바위를 던져 오봉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님의 딸이 얼마나 예쁘면 그럈을까 싶기도 하지만 오봉의 우람한 능선을 보면서 나는 좀 다른 생각을 했다. 오봉을 올려다보며 나뭇짐 지고 서울 방향으로 길을 잡던 젊은이들은 이렇게 넋두리하며 한숨 쉬지 않았을까. “진짜 장가가기 힘들었구나 예나 지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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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날 우이령길은 오솔길 느낌은 아니다. 전쟁통에 미군 공병대가 교통로를 개척하면서 길을 확장하고 넓혀 놨고 정상 근처의 전차 방어막에서 보듯, 한국군 역시 이 길을 군사적 요충지로 관리해 왔다. 이 일대에 설치된 ‘오봉산 유격 훈련장’에서는 지금도 유격 훈련이 벌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우이령 곳곳에는 험상궂은 ‘유격’ 표시를 비롯해 군에 갔다 온 사람들이면 바라만 봐도 서늘해지는 흉물(?)들이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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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식들이 군대 제대했음직한 여자 동기들에게도 유격 훈련장이 마냥 신기했던 모양이다. 석굴암 오르는 길에 담장넘기 코스 훈련장이 별반 통제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죄다 거기에 달라붙었다. 무슨 익스트림 스포츠라도 되는 양 웃고 떠들면서 줄을 잡고 오르고 정상에서 환호도 한다.그러다 한 명은 호되게 어깨를 부딪쳐 끌끙거리기도 했다. 어이구 군 복무를 하거나 마친 아드님들이 봤다면 칠색팔색을 할 곳이다 이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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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우이령길이 사람들의 번다한 발길로부터 보호받고 환경이 잘 유지된 것은 이런 군사적 특수성 외에도 좀 어이없다 할 과잉 대응 탓도 있었다. 세간에는 1968년 ‘청와대를 까기 위해’ 내려왔던 김신조 외 124군 부대가 이 우이령을 통해 서울로 진입했고 그 때문에 우이령이 통제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김신조는 문산 법원리쪽을 거쳐 노고산 등 서울 서북쪽으로 파고들어 진관사 계곡을 지나 사모바위 아래에서 습격 전 마지막 밤을 보냈다. 즉 이른바 ‘김신조 루트’와 우이령은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로 경기도 양주와 서울을 잇는 이 교통로는 공비 침투로로 이용될까 두려워 지레 폐쇄됐고 그예 수십년 세월이 쌓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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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우이령=김신조는 일종의 팩트로 사람들 뇌리에 박힌다. 심지어 우이령길이 오랜 봉쇄에서 관광객들을 받기 시작한 2009년 당시에도 김신조 목사가 초대돼 왕년의 감회(?)를 밝힐 정도였다. 그때 김신조 목사님은 “결과적으로 나 때문에 이 숲이 보존된 것” (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2009.1020) 이라며 농담반 진담반의 말을 하고 있는데 사실 그도 우이령을 구경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험악한 분단의 논리, 그 와중에 서로 까고 죽이는 소모전의 와중에 우이령길은 억울한(?) 공비 침투로의 타이틀을 뒤집어썼고 덕분에 40년 이상 보호(?)받았다.
1968년의 김신조 2009년 우이령에서의 김신조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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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선자령은 대관령 길이 개척되기 이전에 영동과 영서를 이어 주었던 고개라고 한다. 16세기 신사임당이 강릉 친정을 떠나 한양 시댁에 갈 때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踰大關嶺望親庭)는 제목의 시를 짓고 있으니 대관령에 주 교통로를 내준 건 꽤 오래 전의 일이리라. 대관령보다도 3백미터 정도 높지만 대관령 휴게소에서 출발하면 그다지 험한 구석 없는 멋진 트래킹 코스고 한반도의 등뼈라 할 백두대간 태백산맥 구간을 그야말로 일망무제로 굽어볼 수 있는 장관을 취할 수 있어서 사시사철 인기가 높다. 대관령 휴게소 주차장이 미어터질 지경으로 사람들이 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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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영서 지역에는 대설이 내렸고 주말까지도 선자령은 눈밭이었다. 너무나 경치가 좋아서 선녀들이 아이들까지 데리고 내려와 놀아서 선자령(仙子嶺)이라 했다는 유래를 들으며 고새를 여러 번 끄덕일만큼 절경이었다. 몇 걸음만 옮겨 둘러봐도 풍경이 달라졌고 홀연 세찬 바람에 고개를 돌리면 새로운 정경이 연속부절로 펼쳐졌다. 산들이 파도같이 일렁이고 먼 바다는 산처럼 평온하다. 또 한 번 눈 퍼부을 양 푸른 빛 하나 없는 하늘과 겹겹이 눈쌓인 땅은 경계가 없이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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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높은 선자령길을 넓히고 우마차 정도는 통행할 수 있도록 길을 낸 사람은 조선 중종 때 사람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었다. 강원도 관찰사로 오면서 영동 지역 순시하며 백두대간 넘을 때 고생을 했던지 그는 사람들을 동원해 선자령 길을 닦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이 이 선자령을 넘어오면서 적에게 이로운 길을 제공했다 하여 고형산이 부관참시를 당했다는 전설이 있다. 가슴 아픈 사연이긴 한데 그런데 이게 또 ‘우이령 김신조 루트’와 비슷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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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은 강원도 깊숙이 들어온 적이 없었다. 철원, 김화 쪽에서 전투를 벌인 것이 다였을 뿐이다. 선자령을 넘어 강릉을 친 적도, 동해안으로 남하하여 선자령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간 적도 없었다. 즉 강릉이나 평창 사람들은 청나라 군의 변발을 구경조차 한 일이 없었다. 오지도 않은 적의 침략을 소재로 사람들 위해 좋은 일 한 고형산을 부관참시까지 시키는 기묘한 전설이 창조되고 전승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1,21 사태 이후 우이령이 ‘김신조 루트’가 되고 폐쇄된 이유와 비슷할 것 같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적이 올까봐 우리에게 유용한 길조차 가로막고 좁혀야 했던, 있는 길도 없애고, 평탄한 고갯길도 요새로 만들어야 했던 스트레스, 우리 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 봐야 했던 시절과 어느 적이 어느 고개로 넘어올지 노심초사해야 했던 시대가 빚어낸 ‘발가락이 닮은’ 사연
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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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땅은 좁지만 넓다. 차 타고 돌아다닌 인생이라면 차고 넘치지만 두 발로 걷는 나그네 인생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나로서는 실로 ‘한국은 넓고 갈 곳은 많다’ 외칠 뿐이다. 자연도 자연이지만 거기에 이슬처럼 맺히고 열매처럼 익어가고 낙엽처럼 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길마다 고개마다 적잖은 세월 속 여러 대의 사람들이 머물렀다 떠나면서 그 발길로 새긴 사연의 흔적들을 곱씹는 일 또한 매우 즐겁다. 선자령과 우이령에서 만난 조상님과 우리 아버지 세대의 ‘공포’를 뜯어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 공포를 우리 아이들이 맛보는 일은 없었으면 정말로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