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딸은 그만두기로 했다

부모의 빚 앞에 선 딸

by 이가인nasarangmom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알고는 있었다.

부모님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거.


아빠가 집을 새로 지어서 팔려고 했다.

대부분을 대출에 기대어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사이에 코로나가 터졌다.

자재값이 올랐다.

금리가 올랐다.


한 달 이자만 천만 원이 넘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고 있었다.

외벌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엔 생각했다.

그냥 빌려드리고 말자.

그냥 드리고, 이 관계가 편해지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나는 착한 딸 콤플렉스가 있다.

부모님이 힘들다고 하면 도와드리고 싶다.

안타까우면 그냥 드리고 싶다.




그런데.

예전에 한번 상처받은 적이 있다.


첫째 임신했을 때였다.

부모님께 돈을 빌려드렸다.

나중에 조심스럽게 돌려달라고 말씀드렸을 때,

부모님은 조금 서운해하셨다.


그 마음도 이해하려고 했지만,

그때 내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다시는 돈으로 엮이지 말자.

다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전화가 오니, 또 흔들렸다.


남편이랑 얘기했다.


"지금 도와드려도 근본적인 해결은 안 될 거야."


"그것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정리할 수 있게 돕는 거야."


맞는 말이었다.




돈 대신, 집 파는 걸 돕기로 했다.


부동산에 연락했다.


"요즘 누가 그 가격에 사요."

"경기 너무 안 좋아요."

"매수자가 1도 없어요."


안 된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래도 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4시간씩 내 황금 같은 시간을 썼다.

울산 부동산 거의 다 연락했다.

부동산 카페란 카페는 다 가입했다.

내 블로그에 글도 올리고, 유튜버에게 촬영도 의뢰했다.

집을 팔려고 올린 글



제일 힘들었던 건.

내 시간을 나한테 쓰지 못한다고 느꼈을 때였다.

육아도 해야 하고, 콘텐츠도 올려야 하는데.

나는 이렇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부모님도 나름 노력하고 계셨지만,

그때는 그게 잘 안 보였다.


솔직히, 지칠 때가 많았다.




그리고 또 힘들었던 건.

두 분 사이에 끼는 거였다.

집주인은 엄마와 아빠인데, 두 분 의견이 달랐다.


엄마는 가격을 낮춰서라도 빨리 팔자고 했고.

아빠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두 분이 직접 조율하지 않으셨다.

나는 중간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설득하고.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두 분이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그런데 이건 예전부터 그랬다.


엄마는 마음이 힘들면, 아빠에게 바로 털어놓기보다

혼잣말처럼 속마음을 흘려보내실 때가 많았다.


그 옆에는 늘 내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엄마 이야기를 듣는 역할을 맡게 됐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는 동생에게 물었다.

심리 쪽 일을 하는 친구였다.


"엄마가 돈 빌려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그냥 빌려드리고 싶어요. 그런데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거 같아요."


동생이 말했다.


"빌려드리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요. 그런데 그게 정말 가인님한테 좋은 일인가요?"


"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정서적인 문제예요."


멈칫했다.


나는 돈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줄 알았다.

빚을 갚으면, 집을 팔면, 다 해결될 거라고.


그런데 아니었다.

정서적인 문제라니.

그 말이 계속 맴돌았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님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왔다.

자연스럽게 짐을 나눠 드는 역할이었다.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건 내가 져야 할 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의 문제는 부모님이 해결해야 한다.

나는 옆에서 도울 수는 있지만,

대신 해결해 드릴 수는 없다.


내려놓아야겠다.



내가 다 해결해 드릴 수 없다.

부모님 인생은 부모님 거다.




신기하게도.


그다음 주에 집이 팔렸다.

원래 희망했던 가격보다 많이 낮췄다.


손해였다.


그래도 매달 이자가 빠져나가는 것보단 나았다.




집이 팔리고.


엄마가 고맙다고 하셨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아빠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엄청 힘들게 도와서 팔았으니,

솔직히 고맙다는 말 한마디쯤은 듣고 싶었다.

서운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는 아빠의 진심이 고마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표현이 서툴 뿐이라는 것도.


그 과정에서 아빠도 처음으로 취직을 하셨다.

예순셋에.

공장에 단순 노동직으로 최저시급을 받기로 했다.

평생 자영업만 하시던 아빠가.




지금도 상황이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다.

아직 정리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

막막할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생각이 다르다.


집은 내가 도와드렸다.

나머지는 부모님이 알아서 해결하셔야 한다.




착한 딸이 되고 싶었다.


부모님 힘들면 다 해결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


이제는 선을 긋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삶을 지키면서, 옆에서 돕는 딸.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완벽한 딸은 못 된다.

착한 딸도 그만뒀다.


그런데 가끔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뭘 바라고 있는 걸까.


인정?

고마움?

사랑한다는 말?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걸 받기 위해 나를 무너뜨릴 필요는 없다는 것.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도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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