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두 발로 끝나버린 도전
지난 '로켓 엔진의 등장'에서 언급한 대로 일본의 제트 항공기와 로켓 항공기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번외로 분류한 이유는 처녀비행에 성공했지만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을 뿐더러 미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을 당황시킨 A6M 제로 전투기를 만들어낼 정도로 나름 우수한 항공 기술력을 가진 나라였다. 물론 나중에 조종사의 안전은 완전히 무시한 채 성능에만 집중한 항공기로 밝혀지지만 항공기를 만들 수 있는 일본의 기술력과 나름 우수한 성과를 보여주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1942년 4월 18일에는 무너진 미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두리틀의 일본 도쿄 공습 작전이 실시되었다.
첫 일본 본토 공습 이후 1944년 6월부터는 B-29가 일본 공습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첫 도쿄 공습이 개시되었다. B-29는 10톤의 폭탄을 가지고, 6,000km를 날아가 9,000m 고도에서 작전 수행이 가능한 무시무시한 폭격기에 일본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일본은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Tripartite Pact)을 맺었었다. 덕분에 일본은 독일과 군사 교류를 할 수 있었고 1942년에는 독일로 건너가 직접 Me 262 제트 전투기를 볼 기회도 얻었다. 심지어 일본은 이 군사 교류를 통해 원자폭탄에 대한 기술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러나 1944년 4월, 원자폭탄에 대한 기술을 포함해 로켓 항공기와 제트 항공기에 대한 자료들을 담은 잠수함은 독일에서 일본으로 향하던 중 미군에게 발각되어 격침당하고 만다. 결국 절박한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자료만을 가지고 만들어진 항공기가 바로 J8M과 Kikka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B-29는 일본군 전투기가 접근할 수 없는 높은 고도에서 유유히 일본 본토를 폭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엔진 제작 기술이 뛰어나지 않았다. 영전불패 제로 전투기가 조종사의 안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강력한 엔진을 만들 기술력이 안되니 기체를 극단적으로 가볍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B-29가 사용하는 엔진도 완벽한 엔진은 아니었다. 고고도 비행을 위해 엔진의 수명이 짧았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미국이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대량의 B-29를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은 막대한 자본력 덕에 엔진을 소모품처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1942년 7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일본은 결국엔 1943년 9월 ‘절대 국방권’을 채택하며 본토 방위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역시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일본의 계획은 처참히 무너진다. 여기에 1945년 4월에는 오키나와까지 함락되면서 천황이 거주하는 도쿄가 B-29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도에 영향을 받지 않는 로켓 엔진 전투기 J8M이 탄생한 것이다. Me163B 기술도면 3장과 로켓 연료의 성분표와 취급설명서 등 제한된 자료만을 가지고 만들어서 기수부에 보이는 발전용 프로펠러도 없으며 내부 조종석도 일본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힘겹게 만든 J8M은 1945년 7월 7일에 실시된 처녀비행 도중 엔진이 멈추면서 추락하고 만다. 사고 원인은 연료 탱크 설계 문제였지만, 사고 원인을 알아내고 문제점을 해결한 새로운 엔진이 나오기 전까지 J8M은 비행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끝에 8월에 엔진 문제가 해결되었고 기체 생산 준비까지 완료되었다.
그러나 J8M은 끝내 실전에 투입되지 못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3일 뒤인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원자폭탄 팻보이를 투하하면서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때문이다.
물론 J8M이 성공적으로 시험 비행을 마치고 실전에 투입됐더라도 전세가 바뀌진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 살펴봤듯이 로켓 요격기는 놀라운 무기였을지는 몰라도 효과적인 무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미군의 끊임없는 폭격으로 연료와 항공기 생산이 원활하지 않았을 것이다.
1942년, 독일로 건너가 Me 262를 직접 보고 온 일본은 독일과 비슷하게 Nakajima에 Me 262와 비슷한 고속 폭격기를 개발하라고 명령한다. 일본은 왕복 엔진에 비해 부품도 적게 들어가고 저질의 윤활유로도 비행이 가능한 제트 전투기로 적 함정을 폭격하고자 했다.
일본이 요구한 이 기체는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들도 제작에 투입될 수 있도록 만들기 쉬워야 했고, 동굴에 숨길 수 있도록 날개는 접을 수 있어야 했다. 엔진은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개발 중이었던 축류식 제트 엔진을 장착하려 했으나 난관에 봉착하면서 결국 독일의 BMW 003 엔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Ne-20을 사용하기로 한다.
당연히 자료가 온전치 않아 Ne-20 엔진의 추력은 독일의 BMW 003엔진보다 낮았고 기체 역시 부족한 추력에 맞게 원래 Me 262보다 작아졌다. 그럼에도 추력이 부족해 무장 상태에서 이륙 시에는 보조 로켓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바에도 얼핏 보면 Me 262와 비슷하지만 후퇴익 대신 테이퍼익이 적용되었다는 점에서 두드러지는 외형 차이가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Kikka는 1945년 6월 30일 지상에서 시운전을 실시했고 8월 7일에 성공적으로 처녀비행을 마쳤다. 하지만, 여러모로 바로 사용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엔진의 추력이 낮았기 때문에 연료는 16분만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가벼운 상태에서 실시된 시험비행이었다. 이밖에도 레이더나 앞바퀴 커버 등을 장착하지 않은 채 기체를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 성공한 비행이었다.
이후에도 부족한 엔진 추력을 보충하기 위해 RATO를 장착한 두 번째 비행이 8월 12일에 실시되었다. 이때는 연료를 가득 채우고 실시되었는데, 조종사의 잘못된 판단으로 기체는 전복되고 말았다. 이후 기체는 수리에 들어갔지만 그 사이에 종전을 맞이하고 만다.
한편, 1944년 말 Nakajima는 Kikka와 Me262 자료를 바탕으로 Me262보다 조금 더 크고 후퇴익과 전보다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한 Ki-201 Karyu를 구상하기도 했는데 Karyu는 단 한 대도 만들어지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육해공군을 보유할 수 없게 되었고 일본 해군의 주요 전함과 항공기를 생산하던 Mitsubishi 중공업은 3개 사로 분사되었다. Nakajima는 스핀 오프(Spin-off) 방식으로 분사되어 스쿠터를 만드는 Fuji 중공업과 Nissan에 합병되는 프린스 모터 자동차 회사로 나눠졌다.
하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일본이 미국의 병참기지가 되고 1951년부터 미일 평화조약과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의 국권이 회복되면서 1952년 경찰 예비대가 발족되고 이후 1954년 경찰 예비대는 일본 자위대로 바뀌었다.
결국 일본 자위대의 등장으로 일본의 항공산업도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여기에 한국전쟁 동안 미군의 비행기를 정비하면서 쌓은 기반시설과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1958년 1월, Fuji에서 일본의 첫 제트 훈련기를 개발해낸다.
이후에도 1985년 플라자 합의 전까지 탄탄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다수의 걸출한 항공기들을 생산해냈고 오늘날에 와서는 6세대 전투기 개발을 검토할 정도로 뛰어난 항공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배경 사진 출처 : IL-2 sturmovik Forum
국방정신전력원, 제로 전투기의 <영전불패> 신화
Wikipedia, Mitsubishi J8M
WIkipedia, Nakajima Kikka
위키백과, 절대국방권
역사 기술 우주, Me163 로켓 전투기#4
j-aircraft.org Nakajima Ki-201 Karyu
j-aircraft.org Nakajima Kikka
Secret Project Forum, Nakajima Ki-201 Karyu and J9N/J9Y Kikka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독일과 일본의 연합작전 '오리엔트 작전'
네이버 두산백과, 제2차 세계대전과 일본의 항복
네이버 지식백과, 두리틀 공습
네이버캐스트, 미드웨이 해전(194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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