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큰 폭격기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전투기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세계는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무기의 위력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 이후 세계는 앞다투어 핵폭탄을 만들려고 했고 미국은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이 되었다. 더 나아가 미국은 유일한 핵보유국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자신의 최우방국이었던 영국을 포함한 그 어떤 나라에도 핵무기 기술을 공유하지 않기로 했다.
한편, 세계대전이 끝나자 독일을 폭격하기 위해 개발 중이던 장거리 폭격기는 소련에 핵을 투하할 수 있는 폭격기로 임무가 바뀌었다. 바로 냉전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이 존재하지만 당시에는 로켓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핵폭탄을 투하할 수단은 폭격기가 유일했다.
여기에는 초기 핵폭탄의 경량화와 소형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했다. 1968년 등장해 지금까지도 운용 중인 미국의 핵폭탄 B61의 무게는 320kg 밖에 되지 않지만 위력은 340kt이다. 반면에, 1945년 히로시마에 떨어졌던 리틀보이의 위력은 15kt 밖에 되지 않지만 무게는 4.4톤이나 나갔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풀루토늄 원자탄 팻맨은 21kt의 파괴력을 가졌으나 무게는 4.6톤에 달했다.
그리고 폭격기는 이렇게 무거운 핵폭탄을 가지고 본토를 떠나 모스크바까지 가야 했기에 장거리 비행은 필수였다. 이렇게 무거운 폭탄을 들고 장거리 비행을 하려다 보니 폭격기의 크기는 점점 비대해졌다.
결국 폭격기는 혼자서는 적의 영공에 들어가 작전을 펼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둔해졌고, 호위기가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하지만, 폭격기의 항속거리와 속도에 맞춰 비행할 수 있는 제트 호위기 개발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왕복 엔진을 사용해 엄청난 항속거리를 자랑하는 폭격기에 맞춰 비행할 수 있는 제트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중 급유 기술도 완성되지 않았다. 결국, 폭격기에 붙어있다가 적의 영공에 들어가기 전에 분리되어 폭격기를 호위해줄 수 있는 '기생 전투기'라는 개념이 등장하였다.
실은 기생 전투기라는 개념은 미국이 새롭게 구상한 아이디어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독일과 소련에서 폭격기에 전투기를 결합하고 비행 중에는 분리되는 아이디어를 구상했었다. 그렇기에 미국 역시 폭격기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기생 전투기를 개발하기로 한다.
개발은 McDonnell에서 진행하였으며 기체는 폭격기의 항력 증가를 최소화하기 내부 무장창에 장착하기로 했고 이에 맞춰 매우 작게 설계되었다. 달걀 모양의 동체를 가지고 있으며 기수 앞에 폭격기와 연결할 수 있는 갈고리가 장착되었다. 무게와 크기에 민감했던 만큼 조종사의 신장과 몸무게도 제한되었다고 한다.
XF-85의 시험비행은 당장 사용할 수 있는 B-36 시제기가 없었기 때문에 B-29 폭격기를 활용했다. 기체는 B-29의 폭탄수납창 안으로 들어가 장착되었는데 아무리 기체가 작다 한들 B-36보다 작았던 B-29 안으로는 완벽하게 들어가지 못해다.
그래도 1948년 8월 23일 실시된 첫 번째 처녀비행에서 XF-85 자체는 안정적이고 조종하기 쉽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B-29가 만들어내는 난류를 뚫고 기체를 다시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이 과정은 이상적인 환경 아래에서 숙련된 조종사가 조종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2대의 XF-85가 7번의 비행에서 다시 모기로 도킹하는 데 성공한 횟수는 고작 3회에 불과했다. 도킹에 실패한 기체들은 동체에 임시로 장착된 스키 착륙장치를 사용하여 지면에 동체 착륙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폭격기에 수납할 수 있을 정도로 축소된 XF-85는 속속들이 등장하는 동시대 제트 전투기들에 비해 무장 탑재능력이 부족해 소련의 제트 전투기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되었다. 결국 XF-85는 1949년 개발이 취소되었지만 신기하게 미 공군은 '기생 전투기'라는 개념에 흥미를 잃지 않고 이에 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하였다.
미 공군은 이번에는 반대로 폭격기가 제트 전투기를 적의 영공까지 실어주는 역할을 맡고 오히려 전투기가 적의 영공으로 들어가 핵폭탄을 투하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추진된 프로젝트가 바로 (FIghter Convery : 전투기 운송기), 즉 FICON 프로그램이다.
미 공군은 둔중한 폭격기를 호위기로 지켜주는 것보다 폭격기의 긴 항속거리를 이용해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는 전투기를 적진 깊숙이 침투시키는 방안을 내놓았다. 아무래도 전투기가 폭격기보다 민첩하고 운동성 면에서 월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F-84는 최초로 핵폭탄을 탑재 및 투하할 수 있는 제트 전투기가 되었고 전투기가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을 정도로 핵폭탄의 소형화도 어느 정도 이뤄졌음을 볼 수 있다.
F-84E 전투기는 XF-85과 마찬가지로 B-36 동체 하부에 장착되었다. 다만, XF-85와 다르게 기존 전투기를 그대로 장착하다 보니 폭격기 내부로 들어가는 부분은 꼬리날개와 조종석뿐이었다. 이 때문에 GRB-36D의 작전반경은 5~10% 정도 줄었지만 덕분에 조종사는 장시간의 비행 동안 전투기 조종석 안에 머무르지 않고 폭격기 내부에 들어가 쉴 수 있었다.
그 사이에 후퇴익을 적용해 성능이 개량된 F-84F가 등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찰형인 RF-84F까지 나오면서 핵폭격 임무는 정찰 임무로 변경되었다. 원래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 핵폭격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제는 사진 촬영을 하는 정찰로 임무가 변경된 것이다.
이후 전술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 FICON 프로젝트는 XF-85와 다르게 실제로 1955년부터 1956년 사이 전략공군사령부(SAC:Strategic Air Command)에 제한적으로 배치되었지만, 실제로 운용해보니 굉장히 이상적인 조건에서만 운용할 수 있으며 항공기 회수 과정이 매우 어렵다는 단점들이 드러났다.
이처럼 여전히 항공기 회수 작업은 어렵고 위험했다. 실제로 몇몇 RF-84K 정찰기들은 GRB-36D와 재결합하는 과정에서 큰 손상을 입기도 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RF-84K를 GRB-36D 하부에 결합하면 지면과의 기체 간격이 고작 15cm에 불과해 이착륙에 필요한 최저 지상고가 크게 제한되었다.
여기에 1957년에 고고도 정찰이 가능한 U-2 정찰기와 1958년 1월 말에 발사된 미국의 첫 인공위성 '익스플로러'를 시작으로 '정찰위성'이 등장하면서 굳이 복잡한 절차를 거쳐 폭격기와 전투기가 분리하고 적진 깊숙이 침투해야 할 필요가 사라지면서 FICON 프로젝트는 1956년 4월 27일 마지막 비행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FICON(Fighter Convey)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되었던 연구가 Tip-Tow 프로젝트이다. 직역해보면 끝으로 끌어준다는 뜻인데, 아래 사진처럼 두 개의 항공기 날개 끝을 연결해 날개 끝이 연결된 채 하나의 항공기가 다른 하나의 항공기를 끌어주는 개념이다.
앞서 살펴본 XF-85와 같이 Tip-Tow 프로젝트도 처음 나온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항공기의 날개 길이를 늘린다면 글라이더처럼 날개 길이가 길어져 항속거리를 늘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1944년부터 독일에서 실험된 개념이다.
이 개념은 전후 독일에서 건너온 Richard Vogt의 주도 하에 1949년 8월 C-47 왕복엔진 수송기와 Q-14 경비행기를 사용해 1951년까지 순조롭게 실험을 마쳤다. 성공적인 실험 결과에 고무된 미 공군은 프로그램을 확장시켰고 그게 바로 Tip-Tow 프로젝트가 된 것이다.
Tip-Tow 프로그램은 Republic이 맡았고 두 대의 F-84E가 각각 오른쪽과 왼쪽에 연결 장치를 장착한 EF-84D로 개조되었다. 두 기체와 연결될 B-29 또한 연결 장치가 장착된 EB-29A로 개조되었다. EB-29A의 날개에는 깔때기 모양의 결합 장치가 있어서 EF-84D 날개 끝에 있는 창과 결합해 기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EB-29A와 EF-84D는 1950년 7월 20일에 도킹에 성공하고 더 나아가 전투기의 연료를 아끼기 위해 결합 중일 때는 엔진을 끄고 분리할 때 다시 엔진을 작동시키는 실험까지 진행하는 등 1950년 10월 20일까지 총 13번의 테스트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하지만, 문제점도 있었다. 당연히 FICON과 다르게 조종사는 비좁은 조종석에 장시간 머물러야 했다. 그리고 전투기가 폭격기에 결합되어 있을 때 전투기 조종사는 끊임없이 EB-29A의 움직임에 맞춰 기체를 조종해야 했으며, 날개 끝에서 만들어지는 와류는 전투기가 폭격기와 다시 결합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래서 미 공군은 Republic과의 계약을 연장하였다. 이후 Republic은 연결부를 조금 더 키워 전자식 자동비행장치를 장착해 자동으로 EB-29A와 EF_84D가 평형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장치 오작동으로 EF-84D가 EB-29A 날개 위로 뒤집어지면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고 그대로 프로그램은 중단되었다.
여담으로, 앞서 살펴본 FICON에서 사용되었던 B-36과 F-84F 역시 1956년 Tip-Tow와 동일하게 적절한 개조를 거쳐 Tom-Tom이라는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이 실험 역시 초반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1956년 9월 23일, EF-84F가 폭격기로부터 찢겨 나가는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Tip-Tow와는 다르게 전원 무사히 착룩하는데 성공했지만, 이후 Tom-Tom도 나날이 발전하는 제트 엔진의 연비와, 공중 급유 기술 등의 발달로 프로그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취소되었다.
결국 모든 프로젝트가 실망적으로 끝나자 미국은 폭격기 스스로 적 영공에 침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하 2로 비행하는 초음속 폭격기 B-58 Hustler를 개발한다. 그리고 F-84에 탑재할 수 있을 정도로 핵폭탄이 소형화되고 정찰위성을 발사할 정도로 로켓 기술이 발달하자 핵폭탄을 꼭 폭격기로 투하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1950년대 말부터 스푸트니크를 시작으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등장했고 제트 엔진의 연비는 나날이 좋아졌으며 1940년대 말부터는 공중 급유 기술까지 등장하면서 굳이 폭격기에 기생했다가 분리되어 작전을 수행하는 복잡한 방법은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배경사진 출처 : Pinterest
Wikipedia, McDonnell XF-85 Goblin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B61 핵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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