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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Nov 17. 2020

번외 5 : 호위 전투기(1949)

시대를 잘못 태어난 비운의 전투기들

* 틀린 부분이 많아 빠른 시일 내로 수정한 글을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 글에서 말했던 기생 전투기와 같은 맥락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호위 전투기이다. 기생 전투기와 호위 전투기는 운용 방식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탄생하게 된 배경은 기생 전투기와 동일하다.


제트 엔진이 항공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하자, 미 공군은 1943년부터 차세대 제트 호위기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보여준 전략 폭격과 핵폭탄의 영향이 컸다.


B-17 bomber escorted by P-51 @Steam community

하지만, 초기 제트 엔진의 성능은 폭격기의 항속거리를 따라잡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글에서 다뤘던 것처럼 혼합 동력 항공기인 XP-81이 등장했고, 미국 최초의 제트 전투기였던 P-59를 확장한 XP-83도 등장했지만 미 공군의 요구조건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결국 미국은 빼곡히 들어찬 곡사포와 요격기가 득실거리는 적 영공(소련) 깊숙이 아군 폭격기를 호위하는 동시에 적 전투기들을 물리칠 수 있는 속력과 전투 능력 그리고 항속거리를 갖춘 항공기 개발에 착수한다.


Lockheed XF-90


이에 미 공군은 Lockheed와 McDonnell에 장거리 침투 전투기의 작전 요구사항을 정리하여 시제기 개발을 의뢰한다. 설계는 전설적인 엔지니어 Kelly Johnson이 맡았다. 그는 P-80을 바탕으로 동체를 키워 장거리 비행에 필수적인 연료 탑재량을 늘렸으며 P-80의 직선익 대신 35도 젖혀진 후퇴익을 적용했다.


Lockheed P-80 and XF-90 @Flickr

디자인을 보면 상당히 미래지향적이지만 성능은 그렇지 못했다. Lockheed는 야심 차게 내놓았지만 1948년 6월 3일 처녀비행 결과 기체의 가속력이 약하고 기동성이 둔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XF-90은 구조적인 강도 확보를 위해 특수 강철을 다량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경쟁 기종들에 비해 무려 50% 더 무거웠다. 결국 기체는 12G 이상의 급기동도 견딜 수 있는 필요 이상이 강도를 가지게 되었다.


결국 XF-90은 미 공군의 요구조건을 맞추지 못한 채 네바다 사막에서 실시된 핵실험의 표적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놀라운 점은 기체가 얼마나 견고하게 만들어졌는지 3회의 핵폭발에도 불구하고 동체와 날개가 거의 손상되지 않았다.


Lockheed XF-90 with wheels -up landing @National Museum of the USAF

그래서 XF-90은 이후에도 온갖 구조 강도 테스트용으로 사용되다가 1953년에 완전히 파괴되어 스크랩 처리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Kelly Johnson의 행보가 눈에 띈다. 그는 실패에 좌절하지 않았고 오히려 장차 군용기에 초음속 비행이 필수적인 성능이 될 거라 판단하였다.


결국 거금을 들여 초음속 풍동 실험실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XF-90의 실패 요인을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장차 도래할 초음속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 실패 요인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분석했다.


이후 Kelly Johnson은 후퇴익이 아니고서도 초음속 비행이 가능하다는 것과 공기 흡입구의 효율적인 설계가 조파 저항 감소에 필수적이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알아낸 항공 지식들은 훗날 미 공군 최초의 마하 2급 항공기가 되는 F-104 Starfighter 개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Lockheed F-104 Starfighter @Wikimedia commons


McDonnell XF-88


1947년 1월 14일, Lockheed와 함께 미 공군은 McDonnell에 폭격기를 호위해줄 수 있는 차세대 호위 전투기, 일명 침공 전투기(Penetration fighter) 개발을 의뢰한다. 이에 McDonnell은 2대의 XF-88 시제기를 제작하였다.


Lockheed의 XF-90보다 조금 늦은 1948년 10월 20일, XF-88은 기동성과 항속거리는 만족스러웠지만 최고 속도가 1,032km/h로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때문에 두 번째 시제기에서는 조금 더 강력한 추력을 가진 엔진을 장착하지만 연비가 크게 나빠지면서 항속거리가 줄어드는 단점이 있었다.


McDonnell XF-88 @Air force museum

그럼에도 XF-88은 다른 경쟁 기종들보다 여러 모로 성능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고 1948년에 118대를 양산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급변하면서 1949년에 돌연 양산 계획이 취소되고 만다. (급변한 상황에 대해선 아래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에요.)


비록 양산 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XF-88은 XF-90과는 다르게 바로 폐기되지는 않았다. 양산되지 못한 XF-88은 기수 앞에 Allison XT-38-A-5 터보 프롭 엔진을 장착한 XF-88B라는 혼합 동력 항공기로 다시 태어났다. 실험은 1953년에 시작되어 1957년까지 진행되었고 XF-88B는 혼합 동력 항공기 중에서는 최초로 소리의 벽을 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McDonnell XF-88B @Pinterest

그러나 XF-88은 다른 침공 전투기들과 다르게 한국전쟁 이후 호위 전투기에 대한 필요성이 다시 대두되면서  부활하였다. XF-88은 동체를 확장하고 더욱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는 등의 개조를 거쳐 F-101 Voodoo로 재탄생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다루겠지만, F-101 Voodoo 역시 격변하는 냉전 아래 임무가 여러 번 바뀌면서 순탄한 삶을 보내진 못했다.


McDonnell F-101A Voodoo @Wikipedia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XF-88의 외형이 F-4 Phantom II과 묘하게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는 XF-88 설계에 참여한 David S. Lewis가 F-4 개발에도 참여했기 때문이다. 물론, F-101은 XF-88을 확장시킨 기체이고, F-4 Phantom II는 F3H Demon을 확장시킨 기체이다.


North American YF-93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최고의 왕복엔진 항공기 P-51을 개발하고 그 이후에도 후퇴익과 제트 엔진을 결합한 베스트셀러 전투기 F-86을 만든 North American은 1947년에 장거리 호위 전투기 요구조건을 충족하는 F-86의 파생형을 구상 중이었다.


North American은 항속거리를 늘리는 가장 쉽고 확실한 방법인 연료탑재량 확장을 위해 동체를 확장시켜 F-86A보다 항속거리가 2배 더 긴 항공기를 만들어낸다. 당연히 기존 F-86A에 비해 4.8톤이나 더 나가다 보니 사진에 보이듯이 랜딩기어도 2중 타이어로 변경되었다.


공기 흡입구는 수색 레이더와 6문의 기관포를 장착하기 위해 기수 앞이 아닌 동체 측면으로 옮겨졌다. 특히, 공기 흡입구는 NACA의 자문을 받은 독특한 형상의 공기 흡입구가 장착되었는데 고속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여줄 것이라 기대되었다.


North American YF-93A @Wikipedia

이렇게 만들어진 NA-157는 F-86C가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47년 12월 2대의 시제기를 주문한 미 공군은 원형과 외형이 너무 달라진 점을 이유로 F-86C에 YF-93이라는 별도의 제식 명칭이 부여했다.


그러나 2대의 침공 전투기에 비하면 한참 늦은 1950년 1월 24일 처녀비행을 실시한 YF-93은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NACA 공기 흡입구가 높음 받음각에서 공기 흡입이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평범한 외부 돌출형 공기 흡입구를 장착한 2호기도 제작되었으나 나머지 침공 전투기들과 같이 성능 부족과 우선순위에 밀리면서 단 한대도 양산되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NACA 덕트는 살아남아 각종 모터스포츠 업체로 흘러들어 가 스포츠카나 레이싱 자동차에 적용되고 있다.


YF-93A with NACA inlet and YF-93 with conventional inlet @Pinterest

결과


결국 침공 전투기(Penetration fighter)가 되기 위해 개발된 3대의 항공기 중 그 누구도 채택되어 양산에 들어가진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Boeing이 선보인 B-47 Stratojet 폭격기 때문이다. B-47은 6발의 제트 엔진과 후퇴익으로 날렵한 외형을 자랑하는 폭격기로서 미 공군의 눈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B-47의 빠른 속도를 본 미 공군은 호위기 없이도 충분히 적의 영공에 들어갈 수 있을 거란 착각에 빠지고 만다.


Boeing B-47 Stratojet @The National Interest

물론 이러한 기대는 XF-88이 F-101로 다시 탄생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순전한 착각에 불과했다. 한국전쟁에서 소련이 보여준 MiG-15의 성능은 기대 이상으로 위협적이었다.


두 번째는 소련이 선보인 Tu-4 폭격기와 핵폭탄 때문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자국에 불시착한 B-29를 불법 복제해 마침내 고성능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게 되었다. 문제는 이 폭격기의 사정거리에 미 본토가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소련이 핵폭탄까지 보유하면서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세 번째는 핵폭탄을 탑재한 소련 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한 요격기 개발 사업의 등장 때문이다. 미 공군은 핵 만능주의에 빠져 있었기에 전략 폭격기 개발 사업이 최우선이었고 자연스럽게 침공 전투기도 비슷한 우선순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Tu-4 폭격기와 핵폭탄의 등장으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결국, 모든 사업을 다 추진할 여유는 없었기에 호위기 없이 작전 수행이 가능해 보이는 B-47의 등장과 갑작스럽게 등장한 소련의 위협에 호위기 사업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1954년까지 도입 가능한 요격기를 만들라는 1954 Interceptor 프로그램이 추진되었다.


참고자료 및 출처


배경 사진 출처 : Wikipedia

Wikipedia, Lockheed XF-90

Wikipedia, North American YF-93

Wikipedia, McDonnell XF-88

쿵디담, 침공 전투기 계획의 유력한 후보 McDonnell XF-88

쿵디담, 침공 전투기 삼형제의 막내 North American YF-93

쿵디담, 사상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가 되려 했던 록히드 XF-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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