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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Feb 02. 2021

1953년, 초음속 전투기 시대

미국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F-100

방학 동안 전에 작성했던 글을 다시 살펴보면서 많이 놀라는 중입니다. 엉망이더라고요. 앞으로도 더 많이 놀랄 것 같지만, 틈틈이 시간을 내어 한글 파일에 따로 수정하는 중입니다. (전공은 기계공학인데 사학과를 복수 전공을 하는 것 같아 둘 사이에 균형을 잘 맞춰도록 노력 중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잘못된 점이 있다면 댓글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더더욱 제가 전하는 정보는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보단 의심에 의심을 거쳐 읽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North American F-100 Super Sabre


1951년 1월 F-86 Sabre로 크게 자신감을 얻은 North American은 자체적으로 45도 후퇴각을 가진 항공기를 미 공군에 제안했다. 공군의 의뢰 없이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무기 개발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소련의 군비 경쟁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후퇴각이나 엔진만 개선해도 항공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상승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항공기 제조사들은 군에서 요구사항을 제시하기도 전에 새로운 항공기를 설계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이는 다르게 말하자면, 신형 항공기를 내놓아도 얼마 지나지 못해 구형이 되기 십상이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실제로 1940년대 말 1950년대 초에는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전투기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North American 역시 F-86에 이어 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신예기 개발에 적극적이었다.


F-100A @Skytamer

이는 소련도 예외는 아니었다. 소련도 미국에 대응해 빠르게 새로운 전투기를 개발해내는 중이었다.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소련 역시 미국이 MiG-15를 의식했던 것처럼 F-86을 참고해 MiG-15를 개량한 MiG-17 등을 내놓으며 신형 전투기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 공군은 North American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1952년 1월 2대의 시제기 제작을 주문한다. 그리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시제기도 완성되지 않은 8월에 250대의 F-100A를 주문할 정도로 도입을 서둘렀다. 시제기 도입을 서두른 이유에는 F-8F의 개발이 지연도 있었다. 지난 글에서 다루었듯이 Republic은 F-84F를 양산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YF-100A는 예정보다 7개월 빠른 1953년 5월 25일에 처녀비행에 성공하지만, 설계에 다양한 결함이 발견되면서 바로 도입하긴 어려웠다. 그럼에도 F-100는 미 공군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F-100이 원래 장착하기로 한 엔진보다 더 낮은 J57 P-7 엔진을 사용했음에도 수평비행으로 마하 1을 넘겼기 때문이다. 지금은 불가능하지만 기관포로 공대공 전투를 벌이던 당시에는 속도가 항공기의 성능을 평가하는 잣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중전에 등장하는 공대공 미사일은 1958년 금문도 전투에서 처음 등장한다.      


그리고 195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핵폭탄을 계기로 핵 만능주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래서 미 공군은 F-100의 빠른 속도에 주목해 핵폭탄을 탑재하는 방안까지 고려하며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미 공군은 F-100의 빠른 속도와 toss-bombing 방식을 결합하면 훌륭한 핵투발 수단이 될 거라 생각했다.

* toss-bombing 이란 핵폭탄을 투하하자마자 해당 영공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핵 투발 방법이다.


Toss-bombing @Sambach missilers

그러나 서둘러 항공기를 배치하다 보니 F-100은 많은 사건 사고를 겪었다. 예를 들면 후퇴각을 무리하게 준 나머지 기체의 안정성이 많이 떨어졌다. 특히, 이착륙처럼 저고도에서 저속으로 비행하는 구간에서 기체가 볼펜 끝을 잡고 흔드는 것처럼 흔들리기 일쑤였다. 이는 낮은 고도에서 발생하는 사고였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결함이었으며 따로 ‘sabre dance’라고 불릴 정도로 F-100의 큰 특징이 되었다.


F-100은 불안적인 비행 특성뿐만 아니라 구조적 결함이나 유압에도 문제가 발생해 1955년 2월까지 비행 금지 조치(ground)가 내려져 9월이 되어서야 작전 수행이 가능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하자 F-100A는 1958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 1961년 모든 기체가 퇴역하고 말았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서유럽의 냉전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가자 미국은 서둘러 자신들이 사용하지 않은 F-100A를 서독에 배치하기로 하면서 F-100A는 다시 실전에 투입되었다. 이밖에도 1954년에 6대의 F-100A가 따로 정찰용으로 개조되어 서유럽에서 동구권 국가들과 소련을 정찰하는 임무에 투입되었으며 일부는 대만에 배치되기도 했다. 이후 RF-100의 정찰 활동은 냉전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정찰기 U-2가 맡게 된다.


RF-100 with underneath Cameras @F-100.org  /  U-2 @NASA

한편, North American에서는 F-100A의 문제점을 개선한 F-100C이 1954년 3월에 처녀비행을 실시하며 다음 해 7월부터 미 공군에 인도되었다. 이때 미국은 영국은 핵억지 전략을 ‘대량 보복 전략’이라는 형태로 도입하였는데, 이에 맞춰 F-100C는 전술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게끔 전폭기로 개조되었다. C형은 공중급유 장치가 추가되고 신형 엔진을 탑재하는 등의 개선점이 있었지만 A형이 지닌 문제점들을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미 공군은 초음속으로 적진에 침투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해 1970년까지 운용했다.


Refueling of F-100 @Wikimedia commons

여기서 억지란 적으로 하여금 현재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그것이 초래할 비용과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설득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1948년 8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의 핵 독점이 끝나고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을 우려한 영국이 처음 제안한 것이다.


결국 미 공군은 F-100을 제공 전투기가 아닌 공대지 임무를 부여하며 지상 공격기로 사용하기로 마음을 바꾸고 1956년 1월 24일, F-100D가 첫 비행에 성공한다. F-100D는 C형까지 내려온 결함들을 대대적으로 개량한 뒤 1956년 9월부터 공군에 인도되었다. 이후 대만이나 서유럽 등 동맹국들에 중국과 소련을 전술핵폭탄으로 압박하는 수단으로 배치되었다.


F-100 @Wikimedia commons  /  F-100 @Pinterest

제공 전투기가 아닌 전폭기로서 F-100D는 전작들보다 양호한 평가를 받으며 1961년 베트남전에도 투입되었으며 65년과 67년, 두 차례의 개량을 거쳐 1970년까지 운용되었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F-100D는 최초로 적의 SA-2 지대공 미사일 레이더를 파괴하는 Wild Weasel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는 훗날 SEAD(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se)의 시초가 된다. 마지막으로 F-100은 100을 기점으로 1950년대 쏟아져 나오는 센츄리 시리즈(F-101 ~ F-110)의 시작을 알리는 기종이기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운용 기간은 짧았지만 다양한 실험에 투입되었던 F-84와 함께 Zell 프로그램에도 투입되었다. ZeLL은 냉전의 잘 대표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이며 동시에 수직이착륙과도 관련이 있다. Zell은 Zero-Length Launch의 줄임말이며 기체 하부에 로켓을 설치하여 활주로 없이 이륙하는 방법이다. 당연히 연합군의 융단 폭격을 받던 독일에서도 구상되었고,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USAF ZeLL F-100D @Large Scale Planes  /  Soviet SM-30 of MiG-19 @Reddit

미 공군은 ZeLL을 바탕으로 첫 번째, 불시에 침입하는 소련의 폭격기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과 두 번째, 전시에 주요 표적이 될 공항에서 벗어나 항공기를 배치시켜 활주로가 망가져도 항공기를 출격시킬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첫 ZeLL 실험은 F-84G를 사용했는데 이후 핵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F-100가 등장하자, F-100도 ZeLL 실험에 투입되었다. 그렇게 F-100D가 1957년 6월 동체 하부에 로켓 부스터를 장착한 채 활주로 없이 이륙하는 데 성공하지만, ZeLL 프로그램은 나날이 발전하는 유도 미사일 기술과 수직이착륙기의 등장으로 실전에 투입되진 못했다.


이후 F-100은 자신이 대체했던 F-86이나 F-84와 마찬가지로 얼마 운용되지 못하고 1972년 대부분이 일선에서 물러났다. (물론, 1950년대에 개발된 기체가 1970년대까지 운용된 점을 보면 오래 운용된 것 같지만 원래 초음속 제공 전투기로 개발되어 여러 사고를 거쳐 지상 공격용 전폭기로 바뀌는 점을 보면 운용된 게 운용된 게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 1950년대에 쏟아져 나온 수많은 전투기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공대지 임무를 맡았던 F-100이 물러난 자리에는 F-105와 전설적인 항공기인 F-4가 물려받는다. 그리고 완전히 퇴역한 F-100은 QF-100라는 무인 표적기로 개조되어 다양한 대공 미사일을 테스트하는 데 사용되었다.


참고자료 및 출처


배경사진 출처 : Wikipedia F-100


Wikipedia,  North American F-100 Super sabre

WIkipedia, Zero-length launch

Wikipedia, Suppression of Enemy Air Defense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F-100 전투기

네이버 무기의 세계, F-100 슈퍼 세이버 세계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핵억지전략 : 대량보복,유연반응,상호확증파괴 전략

sundin13, F-4C ‘와일드위즐’ 팬텀의 등장과 1972년 라인배커 작전

sundin13, 와일드 위즐... 에필로그 [베트남항공전과 S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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