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첫 초음속 전투기 MiG-19
1953년, 미국의 초음속 전투기 F-100은 처녀비행에 성공하고 1년 뒤 실전 배치에 들어갔다. 그리고 미국은 자신들이 한국전쟁에서 소련 MiG-15에게 빼앗긴 공군력의 우위를 다시 되찾아왔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항공기 수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의 자신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진다.
왜냐하면, 소련에서도 1951년부터 MiG-17을 기반으로 초음속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소련이 당시 운용하고 있었던 MiG-17은 MiG-15의 단점을 잘 보완한 우수한 기체였다. 그러나 냉전 초기에는 무기의 개발 속도가 눈부실 정도로 빨랐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체만 봐도 그렇듯이 1940년대 말에 개발된 항공기는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구닥다리로 전락해버렸다.
이는 전투기 한 대를 만드는데 필요한 자본과 기술력이 낮았던 점도 있었지만, 냉전 속에서 미국과 소련이 하루가 다르게 더 빠른 전투기를 개발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편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전투기를 보유하는 것은 체제 경쟁에서의 암묵적인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소련과 미국은 초음속 전투기 개발에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다만, 미국보다 엔진 기술력이 부족했던 소련은 하나의 엔진만으로는 초음속 돌파가 어려워 MiG-17에 두 개의 Mikulin AM-5 엔진을 장착하기로 한다. 그리고 주익은 기존 MiG-17보다 더 뒤로 젖혀진 58도의 후퇴각을 주었으며, 미국보다 조금 늦은 1954년에 초음속 비행에 성공한다.
여기서 MiG-19의 설계를 보면 그 당시 속도가 항공기 개발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알 수 있다. 단순하게 엔진은 더 강력한 것으로 교체하고, 후퇴각을 더 주는 등 별다른 외형의 변화를 주지 않은 채 모든 설계가 속도를 높이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설계 방식은 개발 시간을 단축해 주면서 동시에 완성도 높은 기체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후 시험 비행에서 보여준 MiG-19의 시험 기체인 SM-9는 초음속이 가능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소련 공군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으며 1954년 1월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이제 막 첫 비행에 성공했으며 양산까지 보완해야 할 점이 많았음에도 도입에 서둘렀던 이유에는 미국의 F-100과 냉전이라는 환경이 큰 몫을 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소련은 하루라도 빨리 MiG-19를 도입함으로써 대외적으로 2세대 전투기이자 미국의 F-100에 견줄만한 초음속 전투기를 보유했음을 선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F-100과 마찬가지로 속도 하나만 보고 양산에 들어가다 보니 여러 사건 사고를 피할 수는 없었다. 예를 들면, 항공기 엔진에서 나오는 열을 잘 차폐하지 않아 연료 탱크에 불이 붙어 기체가 폭발하는 사고도 종종 있었다. 그리고 F-100과 비슷하게 과도하게 젖혀진 후퇴익은 기체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으며 초음속에서 기체의 조종성이 떨어지는 등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MiG-19는 오래 운용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MiG-21과 같이 더 나은 전투기들이 등장하면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래도 이는 곧바로 최신예 전투기 MiG-21을 도입할 수 있었던 소련에 한해서이고, 중국이나 베트남, 이집트에서 MiG-19는 나름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기체가 불안정하고 엔진의 수명도 짧았지만 구조가 단순해 정비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초음속에만 집중했음에도 저고도에서 선회 능력이 뛰어나 베트남전에서 종종 교전 수칙에 얽매어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미군의 F-4를 격추하기도 했다. 이처럼 MiG-19는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F-100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국은 1958년부터 소련으로부터 면허생산권을 받아 소련을 넘어 MiG-19를 J-6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해 오랜 기간 운용했다. 그러나 이는 MiG-19가 중국 공군을 만족시킬만한 우수한 기체여서가 아니었다.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MiG-19 면허생산권을 얻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59년 중·소 국경분쟁과 공산주의에 대한 해석 차이로 소련과의 합작 사업을 전면 취소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 인도와의 국경분쟁 때 소련이 인도 편에 서자 둘 사이는 적대관계로 변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MiG-21과 같은 차기 전투기 도입이 어려워졌고, 공산주의 노선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결국, 1960년대에 와서도 MiG-19를 Nanchang Q-5라는 지상공격기로 운용하며 2000년대까지 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MiG-19를 Shenyang F-6라는 이름으로 북베트남과 북한과 같은 잘 알려진 공산국가뿐만 아니라 수단, 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대륙에까지 MiG-19를 수출하며 소련보다 MiG-19 더 많이 양산하고 운용한 나라가 되었다. (물론, 중국도 소련과의 관계 단절 이후 독자적인 항공기 개발에 들어갔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룰 예정이다.)
그럼에도, MiG-19는 오랫동안 운용할 정도로 우수한 기체는 아녔다. 초음속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외의 요소들을 등한시했으며, 속도에만 집중했다는 말은 더 빠른 기체가 나오면 아무런 장점이 없어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MiG-17을 기반으로 설계된 기체였기에 MiG-17보다 조금 나은 기체였을 뿐 획기적인 성능 향상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터 BVR(Beyond Visual Range) 교전의 시작을 알리는 공대공 미사일의 등장으로 기수에 레이더를 달기 어려운 MiG-19는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설령 MiG-19가 우수한 기체라 해도 하루가 다르게 더 강력한 엔진과 더 뛰어난 항공역학적 설계가 적용된 기체가 나오는 냉전이었기 때문에 MiG-19는 1960년이 되자 모두 퇴역하고 만다. 그리고 MiG-19가 그랬던 것처럼 1959년부터 MiG-21이 MiG-19를 대체하게 된다.
이후, 1958년 금문도 사건에서 공대공 미사일 AIM-9 사이드와인더(Sidewinder)가 등장하면서 드디어 우리에게 익숙한 공중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공대공 미사일을 계기로 항공기에 더욱 많은 항전 장비가 실리면서 대부분의 전투기의 기수에 레이돔이 꼭 들어가게 된다.
배경사진 출처 : Hush-Kit
Wikipedia, Mikoyan-Gurevich MiG-19
Wikipedia, Shenyang J-6
Wikipedia, Nanchang Q-5
네이버 무기의 세계 MIG-19 파머 소련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MiG-19 전투기 / 동구권 최초의 초음속 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