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두 발로 끝나버린 도전
* 해당 글에서 일본은 일본제국(일제)를 의미함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일본에서도 독일의 도움을 받아 제트 전투기를 개발을 시도했다. 보통 ‘제트 엔진’하면 서구 열강들이 떠오르지만 그렇지 않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동안 미국을 당황시킨 A6M 제로 전투기를 만들어낼 정도로 우수한 항공기술력을 가진 나라였다. 물론 A6M은 나중에 엔진 추력이 부족해 조종사의 안전과 항공기의 내구성은 완전히 무시한 채 성능에만 집중한 항공기로 밝혀지지만 독자적으로 항공기를 개발하고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런데 일본이 제트 전투기를 만든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 끝자락에 위치한 일본이 어떻게 서유럽 한가운데에 있는 독일과 협력할 수 있었는지 일본의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틈을 타 수출을 늘렸다. 그리고 서구 열강들이 세계대전으로 아시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질 때를 틈 타 본격적인 아시아 침략에 나섰다. 1918년에 끝난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전쟁 특수와 함께 승전국 지위까지 누리며 급성장했다. 게다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승전국들의 식민지가 많았던 아시아를 포함하지 않아 아시아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이 다시 일어서면서 일본의 수출이 감소하기 시작했고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일본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섰다. 일본의 수출량은 크게 감소했으며 국내에서는 실업과 파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졌다. 이때 일본 군부에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나 독일의 히틀러를 따라 강력한 통치권력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일본에 극우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참고로, 일제강점기 시대의 민족 말살정책도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이후 군사정권은 자원 부족 및 경기 불황, 흉작 등의 문제를 해소하고자 대륙 침략을 준비했다. 시작은 만주사변이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은 류타오후에 위치한 철도를 폭파시키는 자작극(유조호 사건)을 펼쳐 만주사변을 일으킨 뒤 만주를 점령한다. 이후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우더니 1933년 5월에는 만주 대부분의 지역이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에 중국 정부는 국제 연맹에 일본의 만주 점령을 제소하면서 국제 여론이 일본을 강하게 비판했으나 일본은 되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탈퇴하더니 1936년에는 군비축소 회담에 참석하지 않으면서 독자노선을 택하고 만다. 한편, 중국에서는 1936년 공산당과 국민당이 만주를 점령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내전반대·일치항일’이라는 이름 아래 힘을 합치자는 국공합작이 이뤄진다.
그러자 일본은 1937년 7월에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때 미국이 중국을 지원하면서 일본 내에 반미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전쟁의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일본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독일이 빠르게 주변국들을 점령하자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슬로건 아래 동남아 지역의 식민지를 강탈하고자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Tripartite Pact)을 맺는다.
당연히 추축국들과 손잡고 동남아에 있는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를 약탈하는 일본은 미국과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고, 미국은 결국 일본에 철과 석유 금수 조치를 취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서 반미 감정이 고조되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일어난 것이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고 1942년 4월 18일, 무너진 미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두리틀 도쿄 공습 작전이 실시되었다.
이후 1942년 7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몰락하기 시작한 일본은 결국엔 1943년 9월 ‘절대 국방권’을 채택하며 본토 방위에 집중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 역시 1944년 7월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일본의 계획은 처참히 무너진다. 즉, 일본 본토가 미국 폭격기의 작전반경에 들어온 것이다. 여기에 1944년 6월부터 시작된 일본 본토 공습은 11월에는 도쿄 공습으로 발전하면서 일본의 숨통을 조여왔다.
사이판을 잃었을 때 마지막 기회가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 후쿠도메 시게루 해군 중장
게다가 일본에는 9,000m 고도에서 560km/h의 속도로 작전을 수행하는 B-29를 저지할 수 있는 요격기가 없어 속수무책으로 미군의 폭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로켓 엔진과 제트 엔진이라는 두 종류의 동력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켓 엔진은 고도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높은 속력을 낼 수 있었고, 제트 엔진은 자체적으로 공기를 압축해 추력을 만들기 때문에 높은 고도에서 빠른 속도로 비행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일찍이부터 독자적인 제트 엔진을 연구해왔지만, 일본이 만든 축류식 제트 엔진(Ne-10, Ne-12)들은 충분한 추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고출력의 왕복 엔진도 제작할 능력이 없었으니 제트 엔진 역시 제대로 개발될 리 만무했다. 결국, 미군의 폭격으로 상황이 다급해지자 일본은 독일에 제트 엔진 기술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1944년 봄에는 독일로부터 Me 163B 면허 생산권을 획득해온다.
이후 1943년 12월 16일, 일본은 I-29 잠수함은 프랑스 로리엥, RO-501 잠수함을 독일 키엘 지역에 파견해 BMW 003A 엔진 샘플, 설계도 그리고 Me 163B 기체와 관련 자료들을 받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1944년 3월 30일 독일을 떠난 RO-501 잠수함은 미 해군에 의해 대서양에서 격침되었고 항공기와 엔진을 실은 채 4월 14일에 출항한 I-29 잠수함은 7월에 싱가포르에 도착했으나 필리핀 근처에서 미 해군 잠수함에 발각되어 격침되는 바람에 대부분의 화물들이 바다에 가라앉고 만다. 결국 싱가포르에 따로 하역된 극히 일부의 자료만이 항공편으로 일본에 도착하게 된다.
그렇게 일본은 Me 163B 기술도면 3장과 로켓 연료 성분표 그리고 취급 설명서 등 매우 제한적인 자료만을 가지고 역설계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일본판 Me 163 제작에 들어갔다. Me 163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본 육군 항공대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로켓 항공기 개발을 제안했으나, 일본 해군은 검증된 Me 163B의 동체를 바탕으로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44년 7월 해군의 제안대로 Me 163과 동일한 외형을 가진 로켓 항공기가 채택되어 해군은 J8M, 육군은 Ki-200이라는 제식 명칭을 부여하고 1944년 9월에 목업이 완성되었다. (참고로, J8M과 Ki-200은 무장을 제외하고는 큰 차이가 없으니 아래에서는 J8M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그다음 12월에는 Me163과 동일하지만 동력원은 없는 MXY8 Akigusa 글라이더를 만들어 비행 특성을 평가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MXY8은 12월 8일에 첫 비행을 실시했으며 이보다 더 발전된 개념의 MXY9 Shuka도 제안되었으나 MXY9는 전쟁이 갑작스럽게 끝나버리는 바람에 구상으로만 그쳤다.
이후 J8M 개발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945년 중순, J8M이 처녀비행을 실시했을 시기에는 본격적인 대량생산이 가능한 수준에 다다랐다. 연료는 독일의 Me 163과 동일하게 T-stoff와 C-stoff를 사용했으며 엔진은 독일의 Walter HWK 509A 엔진을 기반으로 보다 추력이 약한 Ro.2 엔진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Ro.2 엔진은 1945년 6월 J8M에 장착되어 7월 7일에 드디어 J8M의 처녀비행이 실시되었다.
기체는 별문제 없이 하늘로 올라갔지만 공중에서 엔진이 갑자기 멈추면서 기체는 추락하였고 조종사도 사망하고 말았다. 덩달아 원인을 알아낼 때까지 모든 항공기에는 비행 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바람에 J8M의 실전 배치와 양산 역시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러나 엔진이 갑자기 멈춘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문제점을 개선한 J8M은 다시 양산에 들어갈 듯했다. 하지만, J8M의 처녀비행 일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달 뒤 일본에는 원자폭탄 두 발이 투하되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한편, 일본은 독일과 똑같은 생각으로 Nakajima에 Me 262와 비슷한 고속 폭격기 개발도 명령했다. 일본도 독일처럼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왕복 엔진에 비해 부품도 적게 들어가고 저질의 윤활유로도 비행이 가능한 제트 전투기로 적 함정을 폭격하고자 했다. 그리고 기체는 숙련되지 않은 노동자들도 제작 과정에 투입될 수 있도록 제작 및 양산이 쉬워야 했다.
이러한 요구 조건 하에 만들어진 J9Y Kikka의 전반적인 외형은 Me 262와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많이 다르다. 후퇴익을 사용한 Me 262와 다르게 J9Y Kikka는 테이퍼익을 사용했으며 기체는 부족한 엔진 추력에 맞춰 Me 262보다 작게 설계되었다. 특히, J9Y Kikka는 동굴에 숨길 수 있도록 함재기처럼 날개를 접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45년 4월에는 오키나와까지 함락되어 천황이 거주하는 도쿄가 B-29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패배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나카지마의 전투기 생산 공장도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는데 운 좋게 제작 중이던 기체는 손상되진 않아 시골 농가로 분산 이전되어 6월에 시제기 제작이 완료되었다. 이후 1945년 4월에는 BMW 003A 엔진에 대한 극히 일부만의 자료를 가지고도 신형 엔진 개발에 성공해내면서 Ne-12B 대신 Ne-20 엔진이 J9Y에 탑재되었다.
마침내 1945년 8월 7일, J9Y Kikka는 12분간의 첫 비행에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비행한 기체는 실전에 투입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Ne-20 엔진의 추력은 전에 개발된 엔진들에 비하면 높았을 뿐 여전히 충분한 추력을 낼 수 없어 무장은 물론 많은 장비들이 탑재되지 않은 채 비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8월 12일에는 JATO(Jet-Assisted Take-Off)의 도움을 받아 연료를 만재한 상황에서 시험 비행이 실시되었으나 JATO가 끝난 뒤 가속도가 줄어든 것을 엔진 결함으로 착각한 조종사의 오판으로 기체가 하늘로 채 날아오르기 전에 전복하고 만다.
이후 기체는 수리에 들어갔고 다음 시험 비행을 계획하지만, 이미 8월 6일, 히로시마에 떨어진 우라늄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플루토늄 원자폭탄 ‘팻맨’으로 일본은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
물론, 일본이 조금 더 일찍 이러한 전투기를 개발했을지라도 전세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은 이미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여 제해권을 상실해 원활한 자원 공급이 어려웠다. 반면, 미국은 여전히 엄청난 양의 무기를 생산하며 일본과 독일을 압박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1944년부터 사이판과 괌이 미국에 의해 점령되면서 일본 본토는 B-29 폭격기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으며 1945년 2월에는 이오지마마저 함락되면서 일본의 패망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Ki-200, J9Y 등이 개발되었더라도 전쟁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항공기 제작은 물론 항공기에 쓰일 연료도 부족해 제대로 된 작전 수행은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가미카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제대로 된 조종사 역시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항공산업은 미국의 감시 하에 사장되거나 철저하게 분해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다시 부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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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정신전력원, 제로 전투기의 <영전불패> 신화
Wikipedia, Mitsubishi J8M
Wikipedia, Nakajima Kikka
Wikipedia, Ishikawajima Ne-20
Wikipedia, Nakajima Ki-201
위키백과, 절대국방권
리브레위키, J9Y 킷카
역사 기술 우주, Me163 로켓 전투기#4
j-aircraft.org Nakajima ki-201 Karyu
j-aircraft.org Nakajima Kikka
Secret Project Forum, Nakajima Ki-201 Karyu and J9N/J9Y Kik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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