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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정우 May 18. 2021

1945년, 혼합 동력 항공기 :소련편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제트 전투기 개발이 한창일 때 소련은 엔진 개발 기술이 부족해 바로 제트 전투기 개발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대신 혼합 동력 항공기를 개발했다. 물론 소련은 활발한 첩보 활동으로 연합국 중에서 가장 먼저 독일의 제트 전투기 개발 정보를 입수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터보팬 엔진이 소련에서 만들어졌다는 점만 보아도 잘 드러난다. 이처럼 소련에서도 독일의 제트 전투기에 대응하고자 제트 엔진 개발에 들어갔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실은 소련은 1930년대 중반 스페인 내전에서만 해도 독일보다 우수한 공군력을 갖춘 나라였다. 심지어 소련의 전투기 개발 사정을 몰랐던 독일군은 소련군 전투기가 미국제 항공기를 면허 생산한 것이라고 오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은 좌절하지 않고 현대전에서 더 이상 복엽기가 설 자리는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단엽기 개발에 집중한다.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Messerschmitt Bf 109를 선보이며 전세를 뒤집어냈다. 이와 반대로 소련은 스페인 내전 이후 1938년부터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수많은 고위 장교들과 지식인들이 유배 보내지거나 숙청당했다. 이러다 보니 많은 유능한 장교들과 기술자들을 잃었고 스페인 내전을 통해 얻은 교훈을 잊은 채 1930년대 공군력을 그대로 가지고 독일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그 차이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이 소련으로 진격했을 때 소련과 독일군이 어떤 재료로 전투기를 제작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독일군은 1930년대 중반의 최신 기술을 집약시킨 전금속제 항공기 Bf 109를 동부전선에 투입했다. 반면, 소련은 금속 골격에 나무판자와 천을 덧대어 만든 I-16을 출격시켰다. 물론 I-16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세계 최초로 접이식 랜딩기어를 장착한 단엽기로 유명했지만 Bf 109와는 비교가 어려울 정도로 구닥다리 전투기가 되어 있었다.

Polikarpov I-16 @Pinterest
Messerschmitt Bf 109 @Scale Model Aircraft

상황이 이러다 보니 소련은 하루빨리 공군력을 증강시켜야만 했다. 그래서 언제 완성될지도 모르는 제트 엔진 연구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는 당장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왕복 엔진 항공기 개발에 집중해 빠르게 공군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여기에 소련 공군은 지상에서 진격해오는 독일 육군을 저지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였다. 조금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서부전선에서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융단 폭격(carpet bombing)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드레스덴 폭격’이 일어났는데 반해 동부 전선에서는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갑전인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소련 공군은 저고도 작전을 주로 수행했고 높은 기술력이 필요한 고성능의 고고도 엔진을 개발할 필요가 없다 보니 엔진 기술력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 여기에 빠르게 공군력을 증강하기 위해 무기대여 법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항공기를 들여오다 보니 차근차근 독자적인 엔진 개발 기술을 쌓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는 연합국 중에서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나라 역시 소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병사 1500만 명과 민간인 3500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그중 2000만 명은 소련 국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이 제트 엔진 기술을 공유하며 연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소련은 홀로 제트 엔진을 연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여러모로 굉장히 열악한 환경에 있었던 소련은 제트 엔진에 비해 기술적으로 성숙도가 높으며 안정적인 왕복 엔진을 기반으로 하는 독특한 혼합 동력 엔진인 VRDK(ВРДК : Воздушно-Реактивный Двигатель Компрессорный) 엔진을 고안해냈다. 즉, 항속거리나 함재기로써의 운용 조건을 고려했던 미국과 달리 소련은 기술력이 부족해 혼합 동력 항공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VRDK 엔진은 공기 반응 압축 제트의 줄임말이며, 간단하게 전방에 위치한 왕복 엔진으로 임펠러를 돌리고 임펠러에서 압축된 공기는 연소실로 들어가 추력을 만들어내는 엔진이다. 앞에서는 왕복 엔진이, 그리고 일부 동력이 제트 엔진을 구현하는, 겉보기에는 아주 이상적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I-250's VRDK engine @testpilor.ru


1945년 3월 3일 Mikoyan-Gurevich I-350


VRDK 엔진은 Mikoyan-Gurevich에서 개발한 I-250에 처음 장착되었다. 이후 I-250은 1945년 3월 3일 VRDK 엔진을 가동하지 않은 채 처녀비행을 실시했고 7월 5일에는 처음으로 VRDK 엔진을 점화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일련의 시험 비행을 거치면서 VRDK 엔진은 레시프로 항공기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에도 I-250은 괜찮은 평가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비슷한 시기 Sukhoi에서 개발 중이던 Su-5은 I-250에 밀려 개발이 중단되었다.

Mikoyan-Gurevich I-250 @Warthunder forum
Sukhoi Su-5 @Reddit

그러나 VRDK 엔진은 딱 거기까지였다. 앞서 말한 대로 속도는 높일 수 있지만 시간당 400kg의 연료가 필요할 정도로 연비가 극도로 나빴다. 결국 VRDK는 연료를 너무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가동 시간은 10분으로 제한되었고, 이렇게 제한을 두어도 사용하고 나면 연료를 너무 많이 사용한 나머지 항속거리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행은 왕복엔진만 사용한 채 이뤄졌고 후미 연소실은 비행기에서 부피만 차지하는 짐으로 전락해버렸다. 추가로, VRDK 엔진은 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해 생산성은 떨어지고 단가는 높다는 문제까지 안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1946년 소련에 비교적 온화한 입장을 취하던 영국 노동당 덕에 당대 최고의 엔진 Rolls-Royce Nene과 Derwent V엔진이 소련으로 들어오면서 VRDK 엔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 모두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제트 엔진의 단점을 보완하고자 왕복 엔진을 적용했다. 그러나 얼핏 생각하면 이상적일 거라 기대되었던 혼합 동력 방식은 여러모로 단점이 많았다. 작동 방식이 다른 2개의 엔진이 설치되어 있다 보니 정비 부담이 컸고, 엔진을 2개나 장착했음에도 중량만 늘어날 뿐 성능 면에서 획기적인 향상이 없었다. 결국 전후 왕복 엔진에서 제트 엔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탄생한 혼합 동력 항공기는 빠르게 퇴출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전기자동차의 상용화 과정과 많이 비슷하다. 친환경 자동차 역시 처음에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로 시작했지만 2012년 테슬라에서 Model S를 선보인 뒤로는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고 이제 친환경 자동차 하면 전기 자동차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소련은 미국에 비해 혼합 동력 항공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지만, 소련은 왕복 엔진과 제트 엔진을 결합하는 방식보다 로켓 엔진을 활용한 전투기 개발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소련은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선 다단계 로켓을 사용해야 한다는 시대를 앞선 발상을 한 치올코프스키부터 소련 우주 개발의 아버지라 불리는 세르게이 코롤료프 등 탄탄한 로켓 기술을 보유한 나라였다. 그래서 만약에 다루게 된다면 소련의 로켓 엔진 항공기만을 따로 다루고자 이번 글에서는 다루지 않기로 했다.




참고자료 및 출처

Cover image by sim outhouse

Wikipedia, Mikoyan-Gurevich I-350

Wikipedia, Sukhoi Su-5

Wikipedia, Motorjet

FOSS,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스페인 내전에서의 항공전

쿵디담, 제트 전투기를 향한 열망이 낳은 잡종 : 미그 I-250

책 리카르도 니콜리, 항공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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