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욥 8:7)
지금이야 세계 최강의 전투기를 만들어내는 미국도 처음부터 전투기 강국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 독일과 비교했을 때 독자적인 공군도 존재하지 않았을 정도로 전투기 분야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물론 영국 독일과 다르게 미국은 우수한 전투기의 필요성이 낮은 편이었다. 본토가 폭격을 당하고 있었던 영국과 다르게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물론,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하와이가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본토만은 독일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그 누구보다도 평화로웠다.
따라서, 전투기보다는 연합군 특히 영국에 제공할 폭격기와 이를 호위할 호위기 개발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탄생한 항공기가 우리에게 익숙한 B-29 Stratofortress 폭격기와 P-51 Mustang이다.
하지만 영국과 독일에서 제트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미국에서도 제트 항공기 개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미국의 제트 항공기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영국과 미국은 1940년 'Tizard Mission'를 맺었다. 지난 글에서 이야기했듯이 영국은 독일과 함께 제트 엔진 기술의 선두 주자였다. 하지만 독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어서 안정적으로 새로운 기술들을 연구하고 생산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영국은 미국에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들을 공개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자본과 안정적인 연구 환경을 제공받아 대량 생산 및 연구를 이어가고자 했다. 이때 미국으로 넘어간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에는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 나오는 암호 해독 기술, 레이더에 사용되는 공진기형 마그네트론,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지는 원자 폭탄에 대한 연구도 들어 있었다.
이후 Tizard mission을 통해 미국은 1941년 Gloster E.28/39와 제트 엔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고 영국으로부터 Power Jet W.1 제트 엔진을 B-24 폭격기 폭탄창에 담아 가져온다. 그리고 영국으로부터 가져온 제트 엔진 기술을 바탕으로 Bell에 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새로운 항공기 개발을 의뢰한다.
이후 1941년 9월 Bell과 계약을 맺고 1942년 10월 1일 XP-59A의 처녀비행이 실시되었다. XP-59는 비밀리에 개발하기 위해 과거에 개발 중이었다가 취소된 항공기의 제식 명칭을 빌리고, 비행장으로 이동할 때는 가짜 프로펠러를 달고 이동했다. 하지만, 비밀리에 개발한 것치곤 뛰어난 성능을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제트 전투기의 유일한 장점은 속도였다. 이를 제외하곤 왕복엔진 항공기에 비해 연비도 좋지 못했고 엔진 수명도 짧았다. 그런데 P-59A의 최대속도는 658km/h에 불과했다. 당시 최고의 왕복엔진 항공기였던 P-51의 최대속도가 708km/h, 순항속도가 583km/h 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P-59는 실패작이었다.
결국 100대를 도입할 예정이었지만 도입은 취소되었고 21대의 P-59A와 29대의 P-59B만이 훈련 용도와 제트 항공기 정비 숙달 용도로 도입되었다.
함재기로 사용할 수 있는지 검토하기 위해 미 해군에도 제공되었지만 당연히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또 Tizard mission의 일환으로 Gloster Meteor와 교환되어 영국으로 건너가기도 했는데, 영국에서도 왕복엔진보다 못한 P-59의 성능에 크게 실망한다.
하지만, 육군 항공대는 P-59를 운용하면서 제트 전투기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P-59를 개발하면서 쌓인 기술과 경험은 고스란히 Lockheed의 P-80으로 흘러들어 가 본격적으로 미국의 제트 전투기 시대를 여는데 기여했다.
이후에도 P-59는 기존 General Electric J31 엔진 대신 조금 더 강력한 J33 엔진을 장착하고 동체를 키운 채 장거리 호위기로 제안되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Lockheed P-80에 밀리면서 양산되지 못하고 1947년 프로그램 취소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P-59가 만족할만한 성능을 보여주지 못하는 중에도 독일이 Me 262와 같은 제트 전투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은 미국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결국 미 육군항공대는 Lockheed에 제트 전투기 개발을 의뢰한다.
이때 록히드에서 근무하던 Kelly Johnson은 1939년에 L-133이라는 제트 전투기를 구상할 정도로 전부터 제트 전투기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L-133은 시대를 앞서간 파격적인 디자인 때문에 당시에는 채택되지 못했다.
그래서 록히드는 Kelly Johnson이 이끄는 팀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 팀은 후에 전설적인 항공기 개발팀 Skunk Works가 된다.) 그는 영국, 독일과 벌어진 기술 격차를 단번에 좁히길 원했던 Lockheed에 180일 안에 설계를 마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실제로 1943년 6월 26일 개발에 착수해 143일 만에 항공기를 제작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P-80은 미 공군에 도입되었고 만족할만한 성능을 보여준 미국 최초의 제트 전투기이다. 외형을 보면 아직 독일로부터 후퇴익에 대한 연구 자료가 입수되기 전이라 기존 왕복 엔진 항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초기 제트 전투기들과 다르게 하나의 엔진을 날개 아래가 아닌 동체 내부에 장착했다. 이는 지난 글에서 본 Vampire처럼 하나의 엔진만으로도 충분한 추력과 가속력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발전한 제트 엔진 기술 덕분이다.
P-80은 영국에서 받아온 Goblin 엔진으로 1944년 1월 8일 성공적으로 처녀비행을 마쳤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제작한 General Electirc J33 엔진이 장착되었다. 다만, 2차 세계대전에 투입되기엔 너무 늦게 개발되어 매우 제한적으로 2대가 이탈리아에 잠깐 배치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Mig-15와 F-86과 같은 후퇴익 1세대 제트 전투기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P-51의 뒤를 이어 미 공군의 주력기로 자리 잡았다. 이후 후퇴익 제트 전투기들이 등장하면서 공중전에서는 물러났지만 지상 공격 임무를 수행하는 전폭기로 그 명성을 이어갔고, 복좌형이었던 TF-80C은 T-33으로 개조되어 미국 우방국들의 대표적인 제트 훈련기로 자리 잡았다.
T-33 훈련기는 한 번 더 개조되어 F-94라는 이름으로 냉전이 한창이던 1950년대 미국 본토 방어용 전천후 제트 요격기로 활동한다. 뿐만 아니라 미 해군에서도 관심을 보여 기종 전환 훈련 목적으로 1957년부터 T-33을 항공모함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개조한 T-1(T2V) Sea star를 도입했다.
이처럼 P-80은 우수한 기본 설계와 성능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며 명실공히 미 공군을 만족시킨 최초의 제트 전투기였다.
한편, 제트 엔진과 P-80의 등장으로 1944년 Republic에서도 P-47을 대체할 차세대 제트 전투기 개발에 착수하였다. Lockheed의 P-80이 원심식 J33 엔진을 사용한 것과 다르게 Republic은 미국 최초의 축류식 제트 엔진 General Electric J35를 장착한 날씬한 항공기를 구상했다.
그렇게 1944년 9월 11일 공군에서 구체적인 성능을 제시하고 Republic은 동년 11월 11일에 3대의 시제기를 제작해달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이때 Republic은 전부터 우수한 전투기를 생산해왔고 설계상으론 P-80을 능가할 것이라 판단되어 단독으로 차세대 제트 전투기 개발을 맡게 되었다.
Republic에 대한 강한 확신 때문이었는지 1945년 1월, 미 육군항공대는 처녀비행도 하지 않은 비행기를 100대 가까이 주문한다. 그러나 1946년 2월 28일 J35 엔진을 장착한 P-84가 무사히 처녀비행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엔진 생산과 기체 양산에 차질이 생기면서 P-84는 1947년까지 배치되지 못한 채 시험 비행만 실시했다.
그러는 사이 1947년 9월, 미 육군 항공대(USAAF)가 미 육군에서 분리되어 미 공군(USAF)으로 제편되면서 Pursuit를 의미했던 P-84의 제식 명칭은 Fighter를 의미하는 F-84로 바뀌었다.
이후 F-84B는 1947년 12월부터 배치되었지만, 마하 0.8을 넘기면 날개가 뒤틀리고 5.5.G 이상의 기동을 하면 동체가 우글거리는 등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면서 1948년에는 모든 항공기가 Ground 되어 비행 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더 나아가 F-84 도입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양산 중이던 F-84D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개선되었고 1949년부터 도입된 F-84E에 와서야 쓸만한 항공기가 되어 도입 자체는 중단되지 않았다. 대신 기존에 문제를 일으켰던 B, C, D형은 모두 1952년 퇴역했다. 하지만 F-84E도 엔진 공급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아 제대로 운용하기 어려웠고 결국 1956년부터 일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1940년대 말에는 후퇴익과 함께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F-86이 등장하면서 F-84에도 후퇴익을 적용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 사이 세계 최초로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으며 공중 급유 장치가 장착된 F-84G가 등장해 1951년부터 배치되었고 다행히 전작들과 다르게 별다른 문제없이 1960년대까지 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F-84는 핵 만능주의 시대에 태어나 다양한 실험에 투입되었다. 대표적으로 핵폭격기와 함께 먼 거리까지 비행이 가능하도록 전투기가 폭격기에 기생하는 FICON 프로젝트나 Tip-Tow 프로젝트가 있다. 반대로 적의 핵폭격기를 빠르게 제압하기 위해 활주로가 없이 숲 속에서 불시에 이륙할 수 있는 ZELL(ZEro Length Launch) 실험에도 사용되었다.
FICON과 같은 기생 전투기는 핵 만능주의 시대에 유일한 핵투발 수단이었던 폭격기를 지켜줄 장거리 호위기를 원했던 공군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당시에는 폭격기의 항속거리를 따라잡을 수 있는 제트 전투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공중 급유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기생 전투기에 대해 이야기할 때 다룰 예정이다.)
P-80과 F-84는 미국의 제트 전투기 시대를 연 뛰어난 항공기였다. 하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은 기존의 왕복엔진 항공기와 비슷한 직선익을 사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제트 엔진의 낮은 연비와 공기역학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만들어진 날개 끝 진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날개 끝에 연료 탱크(Tip tank)가 장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이 세계대전으로 쌓은 막대한 부와 생산 능력은 독일과 영국의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미국이 다양한 제트 전투기들을 개발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다양한 전투기들을 바탕으로 미국은 냉전 시대 소련과 군비 경쟁을 펼치며 제트 전투기 시대를 선도하는 나라가 된다.
한편, 독일과 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제트 전투기를 활발하게 만들고 있을 때 소련에서도 제트 전투기가 개발되고 있었다. 다만, 소련은 뛰어난 과학기술력을 가진 영국 그리고 영국의 도움과 막대한 자본을 가진 미국과 조금 상황이 달랐다.
Wikipedia, Bell XP-59
WIkipedia, Bell XP-83
WIkipedia, Lockheed P-80
Wikipedia, Lockheed T-33
Wikipedia, Lockheed T2V
Wikipedia, Republic F-84
Wikipedia, FICON Project
Wikipedia, Tizard Mission
이승로그, 티저드 계획(Tizard Mission)
70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 전쟁사 - 3화 : 얄타이 모순
네이버 무기백과사전, P-80 전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