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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13. 2024

가스라이팅

   10살 전후 사내아이 머리 깎는 작업은 까다롭다. 기분 나쁜 모터 기계음이 그칠 줄 모르고 윙윙거리는 고역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울고 불고 난리를 치거나 꼼지락꼼지락 한시도 가만 안 있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면서 임무를 완수하려는 깎새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버블헤드마냥 건들건들하는 머리통을 연신 부여잡고 바리캉 영점을 잡다 기진맥진이면 아이 요금만 따로 높게 책정해 아예 아이들 출입을 금하는 게 신상에 이롭겠다는 이상한 상상을 하곤 한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면서 말이다.

   아이 머리 십중팔구는 참머리에 억세다. 그 머리에 갖다대는 바리캉을 조심히 다룬다고 다뤄도 씹힐 때가 종종 있다. 그러면 그길로 자지러진다. 양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어른같은 아이가 없진 않지만 아주 드물다. 같이 온 부모를 향해 왜 이런 시련을 겪게 하느냐는 듯이 원망 서린 광선을 내뿜거나 닭똥같은 눈물을 흘림으로써 불만과 울분을 표출한다. 게중에는 아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교활함으로 깎새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고. 

   10살짜리 형은 그나마 얌전한 편이었지만 그 쌍둥이 동생은 전에 호되게 신고식을 치룬 탓인지 한동안 이발의자에 앉는 걸 거부했다. 그때를 기억 못 할 리 없다. 서너 달 전, 쌍둥이를 데리고 온 아이아빠는 머리 깎다 자지러진 작은 녀석 때문에 식겁을 했었다. 깎새는 깎새대로 불감당이었고. 하지만 이번에는 함께 납신 아이엄마 덕 좀 볼 요량으로 아이아빠든 깎새든 한시름 덜었다고 여겼으리라. 살짝 경박해 보이는 아이엄마는 온갖 감언이설로 달래가며 쌍둥이 머리 깎는 데 박차를 가했지만 이번에도 난리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작은 녀석 말본새가 이전에 아빠하고만 왔을 때랑 다르게 예사롭지 않았다. 저번처럼 아프게 머리를 깎는 델 왜 또 데리고 왔느냐, 그렇게 갈 데가 없느냐, 형은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왜 나한테는 억세게 구는지 모르겠다, 아빠엄마는 이런 내가 불쌍하지도 않느냐 따위 비분강개하며 쏟아내는 하소연을 요약하자면 그렇다. 

   그렇게 울부짖는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 표정을 상상해 보시라. 금지옥엽 자식새끼 머리를 맡은 깎새가 본분에 충실한지 쏘아대는 의심의 눈초리가 비록 등을 지고 있어도 비수처럼 팍팍 꽂히는 게 느껴져 등골이 오싹한데다 자존심마저 구겨졌다. 그렇다고 일일이 변명을 늘어놓자니 구차했다. 둘러봐도 내 편이라곤 안 보이는 고립무원, 감당하기 어려운 고독감에 휩싸이고 마는 참으로 더러운 기분.

   말로만 듣던 가스라이팅이 이것인가 싶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직 여물지도 않은 머리통으로 깎새를 농락한 아이는 필경 물건이긴 하되 이런 식이면 영물英物보다는 요물妖物로 변질될 공산이 커 보인다. 아이 머리는 사절이라고 내걸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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