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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an 18. 2024

후불제 소회

   광안대로 요금소를 지나가면 어김없이 하이패스 단말기에서 요금이 후불 처리되었다고 알린다. 자기 명의로 발급한 하이패스 카드인데도 어느 은행 계좌에서 결제가 되는지 까먹은 마누라는 알림 소리를 들을 적마다 알아봐야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는데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문득 혜택을 먼저 보겠다고 지불 유예를 택한 후불제, 미리 돈을 치룸으로써 향후 지불에 대한 부담을 더는 선불제 중 어느 쪽 비중이 큰지 따져보려다가 따지고 말 것도 없었다. 카카오뱅크 체크카드 말고는 온통 후불제였으니까. 하이패스, 동백전 교통카드, 점방 고정비로 나가는 전기료, 수도료, TV 및 인터넷 사용료, 정수기 사용료, 신문대금 따위. 다행인 건 점방 고정비 대부분은 매달 지불할 금액이 미리 정해져 있고 하이패스, 교통카드도 감당할 만큼만 쓰게 조절이 가능하다. 

   지불금액이 작아서 그렇지 후불제는 일종의 도박처럼 여겨진다. 점방 매상이 급전직하하면 가장 먼저 드는 걱정은 기일이 되면 어김없이 청구가 들어오는 후불 결제일 게다. 제때 지불하지 않으면 신용이 추락하고 부담은 가중되며 결국 거널이 나기 십상이다. 2002년 카드대란을 직격으로 맞고 그 여파로 십수 년 간 허우적댔던 자는 지불할 금액이 아무리 작다 해도 후불제는 트라우마다.

   정수기 사용료 결제일은 매달 10일 자동이체된다. 하지만 거래를 맺은 이후로 10일에 이체된 적이 별로 없다. 걸핏하면 이삼 일, 심하면 말일이 다 되도록 청구하지 않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항의전화를 했다. 왜 제 날짜에 돈을 안 빼가느냐고. 돌아오는 핑계로 경리를 보는 직원이 자주 깜빡한다는 거였지만 가당찮았다. 자금 사무를 담당하는 자가 사무실 수입액을 빼먹는다? 직무 유기를 밥 먹듯  저지르는 자는 월급도 아깝다. 당장 돈 빼가라고 불호령을 내린다. 혹자에겐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가급적 지불이 유예될수록 이득이라고 여기는 자라면 말이다. 허나 깎새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지정일을 넘긴 지불 유예는 공포다. 하루에도 수십 번 상환을 압박하는 독촉 전화로 폐인이 되다시피 한 과거가 불쑥불쑥 떠올라서다. 악몽같은 과거를 떨쳐 내려 하지만 갑자기 속에선 신물이 올라오고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조바심이 난다.    

   충전된 만큼만, 주어진 재화 안에서만 이루어지면서 모든 거래가 종료되는 선불은 뒤탈이 없다. 특히 지불 유예를 맹신하다 채무불이행으로 이어졌던 아픈 과거가 주홍글씨마냥 새기고 사는 이에겐 선불만이 자신을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 믿는다. 전기료, 수도료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후불제는 놔두더라도 통상 3년 유지를 전제로 맺은 후불제 계약들, TV 및 인터넷 사용요금이나 정수기 사용료 따위는 계약 만료인 내년 3월 이후 재고할 참이다. 미래를 담보로 지불을 유예하는 후불제를 점차 줄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향한 의지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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