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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05. 2024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지요

   대목이랍시고 밀려드는 손님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는데 한갓지게 이발사 머리는 누가 깎느냐고 진부하게 물어오면 일단 뒤통수부터 한 대 갈기고 싶어진다. 귀가 따갑도록 듣는 질문인지라 깎새 대답도 한결같다. 

   "다른 점방 가서 깎지요." 

   전하려는 뜻은 같으나 수사를 달리하는 버전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지요."

   천하의 가위손이라고 해도 거울 보면서 제 머리 깎았다는 소릴 들어본 적 없다. 곁꾼 딸린 점방이라면 서로서로 머리를 깎아줄 수 있겠다. 허나 깎새처럼 주인이자 일꾼인 1인 점방은 천하없어도 다른 커트점에 들러 거기 책정 요금을 고스란히 지불하고 머리통을 맡기든지 아니면 친분 있는 다른 원장 점방엘 빈손으로 가기는 멋쩍으니 자양강장제 한 박스라도 쥐여 주고는 슬그머니 '머리가 왜 이 모양이지? 연습 삼아 골라주시게' 수작을 걸는지 모른다. 

   '깎새 머리는 누가 깎지?'라는 질문에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대답에는 의외로 웅숭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혼자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가 인생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러서 무기력한 자기를 보완해 줄 불가결한 존재로 타인을 재정의함으로써 관계성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인생은 투쟁이라는 호전적인 구호를 앞세운 독고다이 정신은 기껏 머리에 난 털도 스스로 못 깎는 현실 앞에서 쭈그러들기 마련이다. 역경을 극복하겠답시고 한 손에 바리캉을, 다른 손에 빗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한들 머리를 확 밀지 않는 이상 쥐파먹기 십상이리라. 쓰잘데기없는 만용이나 같잖은 오기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용을 써도 제 머리 스스로 못 깎는다는 당연한 이치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가장 객관적인 위치에서 자기를 재평가할 줄 아는 그야말로 균형감 넘치는 인간일지니. 그에게 시행착오란 느닷없는 변고이라기보다 조절 가능한 성장의 밑거름일 게 분명하다. 마치 스타일에 맞게 깎아 주는 다른 커트점 원장한테 내 머리를 맡긴다면 쥐파먹을 염려가 없어지듯이.

   깎새가 굶지 않고 연명하자면 제 머리 스스로 깎는 기인이 있어선 결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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