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Feb 09. 2024

편입시험 결과

   큰딸이 작년 연말 편입하려고 응시 원서를 낸 대학은 두 군데였다. 하나는 부산에서 제법 알아주는 사립대 간호학과였고 다른 하나는 부산대학교 식품영양학과였다. 간호학과는 2학년까지 받은 학점과 토익점수로 당락을 결정했고 부산대학교는 거기에 필기시험까지 겸했다.  

   지난주에 이미 간호학과 합격 통보를 받았고 부산대학교에서도 그제 낭보가 날아왔다. 두 군데 다 합격하면 어디를 선택할 거냐고 물었을 때 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댓바람에 부산대학교라 명토를 박았다. 졸업 후 취업 보장이라는 실리를 들이대며 간호학과를 밀게 뻔한 어미다. 모녀간에 조율이 필요할 성싶지만 큰딸 고집을 쉬 꺾지는 못할 게다. 거기에 아비의 줄기찬 세뇌 공작에 홀린 탓에 부산대학교 아니면 퇴로를 아예 봉쇄시켜 버렸을 큰딸이다. 파부침선破釜沈船이라!

   작년 연말 즈음 필기 시험 준비로 한창이던 큰딸을 응원하려고 아비는 이런 글을 남겼다. 


​   큰딸은 자기가 편입을 시도하는 게 결코 허황되지 않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격려받고 싶은 눈치였다. 부산대학교를 나온 아비가 그 적임자임은 당연했고. 2학년까지 따낸 학점은 거의 완벽했고 최근에 딴 토익 점수도 만점에 근접한 큰딸은 입시요강에 나온 자격에 모두 부합했다. 하여 시도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판단한 아비는 큰딸이 꼭 거길 들어가 아비처럼 부산대학교라는 기막힌 신세계를 경험하길 진심으로 바라는 심정으로 허파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상한 나라에 대학교라고는 SKY밖에 없다고 여기는 이상하고 멍청한 치들이 참 많지만 부산대학교는 SKY 못지않다. 점수로 매기는 대학순위나 천박한 간판 따위로 학교를 드러내려는 게 아니다. 금정산 줄기가 박력있게 뻗어 나가 학교를 하나의 숲으로 아우렀다. 울창한 숲, 우람한 바위, 깊은 계곡과 맑은 물, 그 속에 자리한 캠퍼스. 학문과 진리를 탐구하는 장으로써 대학교가 유효하다면 이보다 적합한 곳이 또 있을까.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하려는 미래의 진로에 박차를 가하자면 큰딸도 꼭 부산대학교로 향하는 게 맞고 대를 이어 같은 교정을 밟았다는 자부심이야말로 아비로서 누릴 수 있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너무나도 어리석었던 탓에 그곳의 진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허송세월로 학부 시절을 보낸 아비는 큰딸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싶은지도 모른다.​

   ...

   누구든지 마음에 품고 사는 자기만의 장소 하나쯤 있게 마련이다. 그곳을 가끔 찾는 속셈은 현실 속 유토피아, 헤테로토피아에서 가슴 저미는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고단한 일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함이겠다. 심장도 숨 쉬려면 쉬어야 하고 사랑에도 휴식이 있어야 하듯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정서가 잠시 정차하고 들르는 휴게소인 셈이다. 세월의 유탄을 피하지 못해 변모하거나 유실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만의 헤테로토피아는 “어디선가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정서까지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혼자서만 품고 살던 헤테로토피아를 큰딸과 공유하고픈 아비 심정이다. 모든 게 뜻대로 이뤄지면 따스한 봄 햇살이 찬란한 부산대학교 교정을 함께 거닐기로 새끼손가락 걸었다.(2023.12.19 글에서)​


​   함께 교정을 걷는 바람이 가시권에 들어왔다. 큰딸은 부산대학교에서 크게 성장하고 능력을 더 끌어올릴 수 있으며 지금보다 훨씬 행복하게 학교 생활을 즐길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딸이 자랑스럽다.


​   사족- 위 글을 쓰고 얼마 안 있어 큰딸 심경에 변화가 생긴 걸 감지했다. 편입을 너무 낭만적으로만 접근하는 게 아닌가 염려스러워 더 냉철하게 결정할 거라며 장고에 들어갔다. 이에 아비는 가족 단톡방에다 이런 메시지를 남겼다. 


​   큰딸 진로에 대해 아빠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을 작정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간섭이 너무 심하다는 느낌이 싸해서다. 

   물론 아빠 입장에서야 부산대학교라는 국립대의 위상과 인적 네트워킹이 향후 큰딸이 그 대학을 졸업한 이후 직업 선택이나 그밖의 진로에 충분히 도움을 주고도 남는다고 확신하고, 무엇보다도 2년밖에 안 남은 대학생활을 전보다 학구적인 분위기 속에서 더 다양한 가능성과 기회가 공존하는 큰 대학에서 누리는 데 부산에서는 부산대학교만한 데가 없다고 단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정작 대학은 큰딸이 가는 거지 아빠가 가는 게 아니다. 대학 졸업 이후 진로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큰딸 본인이 선택하는 것인데 굳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부모의 월권이다. 말인즉슨, 큰딸 인생은 큰딸이 사는 거다. 

   아빠로서는 따스한 봄 햇살이 찬란하고 봄꽃 만발한 부산대학교 교정을 우리 가족 함께 느긋하게 걷는 걸 상상했지만 그런 낭만이 사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모든 걸 접었다. 그냥 큰딸은 자기가 마음먹은 대로 실행하시라. 아빠는 그 결정에 두말없이 따르고 후원할 테니. 하여 진학과 관련해서는 더는 언급을 하지 않겠다.

   큰딸, 그동안 편입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앞으로도 네 능력을 믿고 거침없이 전진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래야 동생이 언니를 본받아 힘을 얻지.​

작가의 이전글 구간단속 단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