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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10. 2024

타사打寫

   필사筆寫하려는 충동이 이는 까닭은 그간 선명하지 않고 애매모호했던 인식을 일거에 정립시킨 쾌거를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이다. 모든 게 자꾸만 덧없기만 한 이 멜랑콜리를 떨쳐낼 방도를 찾을 수 없어 무지 괴로웠다. 아주 없애질 못하겠으면 차라리 달래가면서 품고 살면 되겠으나 그러자니 맷집이 너무 약하다. 그러던 차에 이 글을 찾았다. 그리고는 인식을 조종하는 지령이 되어 지배당하고 말았다. 하여 여기에다 필사筆寫 대신 타사打寫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와 같기를 바라면서.



   얼마 전 어느 여름날, 나는 과묵한 한 친구와 아직 젊지만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던 한 시인과 함께,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기는 듯한 시골길을 산책한 적이 있다. 그 시인은 주변 풍광의 아름다움에 대해 연신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서 환희의 기분을 누리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결국엔 소멸되고 말 거라는 생각, (...) 그 겨울이 오면 그 자연의 아름다움도 사라지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달리 말하면, 그에게는 그가 사랑하고 찬미했던 모든 것들이 덧없음의 운명 때문에 제 가치를 손상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짧은 글 <덧없음>(1915)의 첫머리다. 모든 것들이 '덧없음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 때문에 슬퍼하던 시인을 회고하며 글은 시작된다. 덧없음. 독일어로는 페어겡리히카이트(Vergänglichkeit)라고 읽는 단어고, 영어로는 트랜션스(transience)라고 발음되는 단어다. 아마 한자어로는 무상(無常)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순우리말로는 덧없음. 국어사전을 보니 덧없음은 세 가지 뜻을 갖는 것으로 돼 있다. 첫째, 알지 못하는 가운데 지나가는 시간이 매우 빠르다. 둘째, 보람이나 쓸모가 없어 헛되고 허전하다. 셋째, 갈피를 잡을 수 없거나 근거가 없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프로이트는 시인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었으나 동의할 수는 없었다고 적는다. 물론 모든 것은 소멸한다. 그 어떤 완전하고 아름다운 것도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인의 말이 사실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슬퍼만 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그는 반문한다. 오히려 그 덧없음으로 인해 아름다움의 가치가 더 증대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인즉슨,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정신분석가답게 말하고 있다. 대상들의 운명이 실제로 어떻든 간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에 대해 우리가 어떤 심리적 태도를 취하느냐다, 라고.

   그래,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시인이 그럴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라고 왜 낙관적으로 자연을 향유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왜 그럴 수 없었는가 말이다. 프로이트는 역시나 정신분석가답게 그 시인이 자연을 즐길 수도 있었는데 모종의 마음의 작용으로부터 그것을 '방해받았다' 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자연의 덧없음에 생각이 미치자 그 시인은 언젠가 그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 그 상실로 인해 겪어야 할 애도의 고통을 미리 맛보고 말았다는 것, 그런데 마음은 예상되는 고통을 본능적으로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는 미리부터 그 대상에 대한 향유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최근 나는 그 시인의 '방해받은' 기쁨에 대해, 또 애도의 고통을 피하려고 미리 움츠러들어야 했던 그 마음의 쓸쓸한 조심성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아름답고 위대한 많은 것들이 덧없이 사라진다. 건물이 사라지고 사람이 사라진다. 전통과 명성이 사라지고, 신념과 우정이 사라진다. 나이를 먹고 보니, 라고 건방을 떨 나이도 아닌데 나는 이 세상 많은 것들의 덧없음을 점점 더 자주 느낀다. 그리고 그 덧없음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그걸 눈치챈 어떤 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환멸은 인생 감정 공부의 마지막 단계지. 자네가 이참에 좀 더 성숙해질 모양이군.: 그런가. 그렇다면 이 '성숙한 환멸'은 앞으로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덧없다, 그러나 비관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하는 프로이트의 낙천주의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그 글을 최근에 다시 펼쳤다. 거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런 문장을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었다. "그 시인과의 대화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해 여름에 있었던 일이다. 1년 후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버렸다." 이번에는 조금 울컥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는 1차대전이 가져온 저 압도적인 덧없음을 경험하고서도 끝내 시인에게 동의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구나. 그렇다고 갑자기 낙천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의 환멸이 조금은 덧없어졌다. (2015.9.3) (신형철, <덧없음에 대한 토론-프로이트와 릴케>,『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62~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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