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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Feb 21. 2024

과거 속 기억

   기록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정답을 찾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일단은 이렇게 답을 해본다. 기록이란, 당장의 의미나 가치를 증명할 수 없다 하여도 묵묵히 세상에 흔적을 남겨두는 일이라고.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청자가 되어, 고단했던 당신 생의 목격자이자 한 명의 지지자가 되어.(김미양, (<청년의 소리-당신의 청자가 되어>), 국제신문, 2022.08.08.에서)


​   부산 영도문화도시센터가 2022년 6월부터 시작한 온라인 '기억전당포' 사업과 병행한 오프라인 프로젝트에 참여한 청년작가 김미양은 영도 신선동 동삼동 남항동 영선동 청학동 봉래동에 지정된 거점 공간을 돌며 마을 어르신들이 '옛날 사진'을 가지고 오면 참기름으로 바꿔 주면서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작업에 참여하면서 느낀 바를 칼럼으로 썼고 그 중 일부가 위 인용문이다.

   2000년대 이전 영도 주민 생활사가 담긴 사진을 수집하고 영도 곳곳에 얽힌 개인의 장소기억도 수집해 공통의 기억으로 확장해나간다는 게 아카이빙 프로젝트의 취지였지만 기억을 맡기는 어르신들은 요상하게 여겼단다. 참기름 유혹에 넘어가긴 했지만 '옛날 사진'을 보면서 '그 사진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려는 청년 무리들이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뭣에 쓸라고?"가 인터뷰하는 내내 가장 자주 들었던 질문이었다니 당연하다. 청년작가는 그럴 적마다 "저는 어르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어르신이 살아오신 이야기가 소중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할 말들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기억전당포'란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비단 영도만의 전유는 아니더라. 사진 한 장에 담긴 기억을, 사진으로 다 담아내지 못한 프레임 밖의 수많은 기억을, 그저 흘러간 과거 이야기가 아니라 2020년대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도 의미 있을 소중한 '동네의 기억'을 발굴하려는 노력은 의외로 도처에서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매력적이기에 기억을 저당잡으려고 꾸역꾸역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가. 다음 인용문들에서 그 힌트를 얻으려 한다.


​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을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전혀 다른 눈으로 보았다.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현재의 연속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단순히 현재만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미리 달려가는 존재이며 동시에 과거를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하는 존재다. 인간은 ‘다가올 미래’와 ‘지나간 과거’를 함께 품음으로써 현재를 산다. 그러므로 미래는 다가올 시간으로써 현재 안에 있고, 과거는 간직된 시간으로서 마찬가지로 현재 안에 있다. 현재 안에 미래와 과거가, 다가올 것과 지나간 것이 함께 속해 있다.(고명섭, <아침 햇발-소녀상과 기억투쟁>, 한겨레, 2017.01.25 에서)​​


​   인간 각자는 영원의 시간이 흘러와 머무는 체류지이자 수십억년 시간이 쌓은 기억의 비밀이 담긴 저장소다. 인간의 유전정보가 바로 그 기억의 저장소라 할 수 있다. 영원의 기억을 담은 유전정보에는 과거를 똑같이 반복하게 하는 ‘닫힌 부분’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상상력을 허용하는 ‘열린 부분’도 있다. 진화가 고도화할수록 ‘열린 부분’이 커지고 자유의지도 함께 자란다. 인간이란 영원의 시간을 통해 형성된 존재이자 자유의지를 발휘해 역사를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여기서 나온다. 영원의 상속자인 인간이 미래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고명섭, <유레카- 엑스(x)의 존재론>, 한겨레, 2017.04.12에서)​


​   손님 머리를 깎다 보면 기억이란 놈이 불쑥불쑥 나타나 장난질이다. 떠오르는 거개가 비록 얼굴이 화끈거릴 만치 창피하고 볼썽사나운 것들이라손 이왕 재생됐으면 끊지 않고 놔둬야 한다. 그 기억이란 놈을 주름지게 한 그 사람을 응시할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십수 년 전, 같은 사무실 동료인 남자와 드잡이하던 기억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그 남자가 나타나야 할 그 어떤 개연성조차 없어서 깎새는 당황스러웠지만 이왕 떠오른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그가 깎새 옆구리를 무르팍으로 가격하는 선빵을 날리는 장면에서 일시정지. 깎새가 기억 속 남자를 극도로 혐오케 한 결정적 계기가 됐던 바로 그 장면과 정면으로 직면하자 고정관념이란 감옥을 탈주한 기억이 상황을 재조성해 관계를 재정립시킨다.

   '왜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는가'부터 '그는 왜 불만과 증오가 쌓였는가', '척을 져야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따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놈의 '왜?'의 파도에 마침내 난파되는 깎새. 날카로운 가윗날에 손가락이 베이고 나서야 기억의 늪에서 겨우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결론은 없다. 없지만 그가 다시 보였다. 그와 우연히 조우한다면 서먹서먹할지언정 외면하진 않을 자신이 생겼다. 운이 좋아 말문이 트인다면 그 당시를 함께 복기할 수도 있겠고 해묵은 악연의 끈이 끊어지는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과거 속 기억에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허용하는 '열린 부분'이 있다는데 그 '열린'이란 표현은 필시 뇌과학적 수사일 테지만 박제되고 경직되었던 감정의 물꼬를 튼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이고 싶다. 하여 '다가올 미래'와 더불어 '지나간 과거' 속 기억은 현재를 윤활하는 역할로써 값지다. 불쑥불쑥 나타났다가 이내 달아나려는 기억의 꼬리를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까닭이겠다. 기억했으면 얼른 기록해야 한다. 청년 작가의 말마따나 묵묵히 세상의 흔적을 남겨두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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