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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r 05. 2024

하나를 보니 열을 안다

   부부가 사내 아이 셋을 거느리고 점방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일순 긴장한 깎새였지만 이내 안도했다. 일전에도 왔었던 순둥이 삼형제라서. 큰형 밑으로 쌍둥이 동생 둘은 용모 단정하게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삼일절 연휴 마지막날인 일요일에 행차하신 게다. 손님이 좀 밀리더라도 신경을 더 써주겠노라 마음먹는다. 

   깎새 입장에서 착한 아이와 착하지 않은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단순하다. 머리 깎을 때 수굿하게 얌전빼면 착한 아이, 몸뚱아리 뒤척거리기 일쑤고 바람개비마냥 머리까지 팔랑거리다 못해 바리캉만 갖다대면 '아야!' 외마디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는 아이라도 진상 손님 각이다. 참으로 깎새다운 잣대다 보니 믿을 만한 구석이라곤 별로 없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알듯 점방 안에서 드러나는 행상머리만으로도 남들로부터 어떤 평판을 들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깎새는 아동심리학자인 양 자부한다. 

   동생들과 두어 살 터울이 졌을 뿐인 큰형은 또래답지 않게 점잖아서 되우 듬직하다. 커트보를 두르기 전부터 목석연하면서 오직 깎새가 이끄는 대로만 따른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나면 수줍게 "고맙습니다" 감사의 뜻도 잊지 않는다. 이런 아이가 이쁘지 않으면 누가 이쁘단 말인가. 쌍둥이 중 막내는 눈웃음이 일품이다. 큰형처럼 듬직하면서도 소리없이 눈으로만 가만히 웃으면 꼭 깎새더러 '아저씨를 믿지만 살살 좀 해주세요' 아양떠는 듯해 귀엽기 그지없다. 쌍둥이 중 형은 큰형과 막내 장점만을 두루 겸비해서 어쩌면 셋 중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일는지 모른다. 

   삼형제는 누가 머리를 깎고 있든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대기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다. 무료하면 제 부모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눌 뿐이다. 용변이 급하면 화장실 위치를 물어보고 소리소문없이 다녀온다. 그러니 깎새가 있는 성의 없는 성의 삼형제에게 몽땅 쏟아붓고 싶어 환장할 수밖에. 삼형제를 잘 키운 부모를 추어올리려는 수작으로 깎새가 씩둑거렸다.

   "데칼코마니라고 들어봤죠? 큰형 밑에 쌍둥이 둘은 똑같은데 얘네들보다 오륙 년 선배뻘인 삼형제가 있어요. 요즘 뜸한데 안 오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첫 방문부터 깎새는 선배뻘 삼형제 엄마랑 한바탕했더랬다. 중학생 큰형 머리를 투블럭으로 해달래서 깎아줬더니 아이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어놨다며 애들 엄마가 발끈하면서 대거리가 벌어졌던 게다. 투블럭을 알기나 하냐는 막말로 선전포고를 날리자 이건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어 투블럭 다른 버전이 있냐고 되물었더니 미장원은 저렇게는 안 깎았다면서 숫제 깎은 머리 도로 갖다붙여 놓으라고 억지라도 부릴 판이었다. 애들 엄마가 알고 있던 건 옆머리만 투블럭이고 뒷머리는 상고머리로 깎는 변형 투블럭이었다. 그걸 자주 가는 미장원에서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걸 생략하고 편하게 투블럭, 투블럭 하다보니 그런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첫인상이 엉망이었으니 이후는 안 봐도 뻔하다. 장발을 한 삼형제가 나타나면 일타삼피인 매상보다 저걸 어찌 깎아낼지 짜증부터 났던 깎새였다. 무진장한 숱에 철사와 맞먹을 만치 억센 참머리를 연달아 셋씩이나 깎아내야 하는 건 고역 중의 고역이다. 일도 일이거니와 초등학생인 쌍둥이가 이발의자건 대기석이건 전혀 개의치 않고 들썩거리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꼴이 너무 성가셨다. 이발의자에 앉은 아이는 아이대로 가렵다고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거나 지겹다고 배배 꼬질 않나 대기석에서 기다리던 아이는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마냥 장난할 거리가 없나 하고 점방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나대더니 그게 지루해지자 점방 문을 열었다 닫았다 무람없기 짝이 없다. 그러다 엄마를 붙잡고 보채기 시작하면 점방이 쩌렁쩌렁, 깎새 인내력을 극한까지 몰아세운다.  

   아이 엄마는 아이들이 소란스러울 적마다 "아들만 셋을 키우다 보니"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지만 공감할 리 없다. 인구소멸의 길로 접어든 대한민국 현실에서 아들 셋을 낳고 키우는 게 귀감이 될 수는 있겠다만 낳은 것만으로 부모 도리가 끝났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낳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아들만 셋인데도 더 어려서 행상머리를 운운하자면 더 고약해야 할 아이들이 철부지 어른보다 오히려 더 의젓한 건 그 부모가 아이들 버르장머리를 어떻게 길들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동시에 "아들만 셋 키우다 보니"가 핑계로밖에는 안 들리는 방증이다. 

   머리 깎을 때 보면 다 보인다. 하나를 보니 열을 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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