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나는 글 쓰는 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이나 수업을 할 때 이 이야기를 해왔다. "책상 앞에서의 상상력은 한계가 있다. 내가 상상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상상한다. 어떤 상상보다 현실이 훨씬 앞서간다. 현실을 찾아서 문을 열고 나가라…."(한창훈, 「공부는 이쯤에서 마치기로 한다」, 한겨레출판, 217쪽)
깎새는 선천적으로 상상력이 빈약하다. 상상력이 무디다고 창의성까지 변변찮을 까닭은 없겠으나 창의적 사고에 상상력이 요긴한 연료임엔 분명하다. 백지에다 없던 글을 짓겠다고 깝죽대려니까 쪼들려서 특히 더 간절하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상상력을 자인하는 건 어이없고도 김빠지는 선언이다.
상상하지 못하는데 참신하고 기발할 리 없다. 그럼에도 악착같이 써제끼고는 싶어서 궁한 김에 찾아낸 방법이 현실 천착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심정으로다가 말이다. 저열한 능력의 소유자가 없는 얘기를 지어내는 것처럼 분수에 안 맞는 짓도 없다. 하여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그것이 일상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일상을 비범하게 그려보겠다는 게 상상력을 대체하는 글짓기 방도다.
깎새 브런치를 구독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좋아요'까지 눌러주는 한 단골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백하게 표현하는 글이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 어떤 상찬보다 고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