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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r 09. 2024

찬란한 소멸

   2017년 7월, 배우이자 아내였던 윤소정 영결식을 치르고 스무날 남짓밖에 안 지나 현역 최고령 연극배우 오현경(당시 81세)와 인터뷰를 잡은 게 제아무리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기자라고 해도 저으기 망설였던 경향신문 문학수 선임기자였다. 허나 오히려 오현경은 “괜찮아, 괜찮아”하며 선선히 수락했단다. 반려자를 앞세운 원로배우지만 “내 인생의 연극”으로 손꼽는 《봄날》(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의 막은 올려야겠기에 인터뷰에 응한 듯싶었다. 

   연극 《봄날》은 탐욕스러운 아버지와 일곱 아들의 이야기란다. 사실주의 연기의 대가 오현경은 초연 때부터 지금까지 이 연극의 ‘아버지’였고 그 ‘권위적이고 욕심 많은 아버지’는 이미 그의 몸에 내장된 캐릭터라고 하니 이 연극으로 2009년 대한민국 연극대상 연기상을 받을 만도 하다. 연출을 맡은 이성열은 “작고 깡말랐지만 무대 위에 서면 그 누구보다 커 보인다. 신기하다. 유연하고 분명한 그의 발성은 우리의 귀를 홀린다. 선생은 우리가 잊고 사는 ‘빈자리의 기억’이다. 그가 해주는 북촌의 민어장수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는 시간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이제 희미해진 옛것의 아름다움과 향취를 느낀다. 또 선생은 ‘꺼지지 않는 라디오’다. 엄청난 수다쟁이다. 하지만 그의 입담은 맛있는 음식처럼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만약 그가 입을 다문다면 밥을 굶은 아이처럼 우리 모두 허기질 것이다.” 며 배우 오현경을 “나의 작은 거인”이라 불렀다.(2017. 07.18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먹고 사는 생리적 욕구 말고 갖고 싶은 걸 고르라면 글 잘 짓는 재주 외에 '유연하고 분명한 발성’이다. 무대를 씹어 잡숫는 연극배우를 유독 흠모하는 까닭이겠다. 학과 연극 동아리에서 무려 세 편씩이나 배우로 참여했음에도 억세고 흐리터분한 발음을 끝내 어쩌지 못해 말하지 않는 게 이득이라는 좌절감이 원한처럼 맺혀 사는 인간에게 그들은 일종의 대리만족이다. 그에 더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하려는 각고의 노력이 마치 시련과 역경에 맞서서도 우직하게 전진하는 고난자의 행로난을 닮아 경건하기까지 하다. 드디어 막이 오르고 치열하게 담금질한 내가 실제의 나와 겹쳐져 언어와 행동으로 몸 속의 모든 응어리를 무대 위에서 활활 불태움으로서 극강의 쾌감(카타르시스)에 이르게 된다. 이게 연극이야! 라는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연극이 끝나고 조명마저 꺼져 적막해진 무대 위에서 찬란할 수밖에 없는 소멸성에 치를 떨면서 마침내 사라진다. 

   2024년 3월 1일, 배우 오현경이 별세했다. 향년 88세. 5일에 치뤄진 영결식에서 손정우 대한연극협회 회장은 “선생님은 암투병 중에도 연기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 스스로를 채찍질하셨다”며 “대사 한 줄이라도 틀리면 밤잠을 설칠 정도로 완벽을 추구하셨다”고 추모했다. 고인과 실험극장 창립동인으로 활동했던 배우 이순재는 “TBC 시작할 당시 함께했던 남자배우들이 저와 고인을 포함해 6명 있었다. 그중 이낙훈, 김동훈, 김성옥, 김순철이 다 자네 기다리고 있다. 나도 곧 갈 테니 우리 가서 다 같이 한번 만나세”라고 말했다.​​

   찬란할 수밖에 없는 소멸성에 치를 떨면서 마침내 그는 사라졌다. 


​   김현은 말했다.

   "사람은 두 번 죽는다. 한번은 육체적으로. 또 한번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나는 마르틴의 최종적 죽음을 얼마라도 지연시키기 위해 그의 이름을 여기 다시 적는다.

   마르틴 크론베르크(1957~1993) (고종석, 『빠리의 기자들』에서)


​   오현경(1936~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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