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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r 19. 2024

독서는 독락獨樂​

   요즘은 뜸한데 커트를 마치면 꼭 자기가 읽었다는 책을 빌려주고 가는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아마 점방 한 켠 선반 위에 널부러진 책들을 보면서 '독서하는 깎새'에게 진한 동료애를 느꼈지 싶다. 책은 얼마나 보느냐, 사서 읽으면 비용이 만만찮을 텐데 차라리 도서관에 가서 빌려 보는 건 어떠냐 따위를 물으며 관심의 수위를 높이더니 급기야 자기가 다 읽은 소설책을 빌려 주기 시작했다.

   한번은 고故 이어령 교수가 썼다는 추천사가 첫머리를 장식한 『노인과 바다』 소설책도 건네줬는데 어린이 전용 서적 출간으로 유명한 출판사에서 양장판으로 낸 세계문학 전집 중 한 권이었다. 보통 책보다 글자 크기가 곱절은 커 특히 노인들이 오래 읽어도 눈에 부담이 덜 가게 잘 배려한 티가 났다. 어린이나 노인을 위해 가공, 편집된 것이라면 원작에 집착하는 독자의 구미를 당기기에는 한계가 분명해 보이긴 했다. 

   노인은 이전에 빌려줬던 책을 회수하고 새로 가져온 책을 빌려주는 걸 머리 깎는 것보다 우선했다. 이를테면 톨스토이의 『부활』(역시 같은 출판사의 전집 중 한 권)을 읽고 있는 중인데 다음번에 빌려줄 예정이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린다. 따라서 『노인과 바다』는 노인이 다음번 머리 깎으러 오기 전까지 다 읽어야 하는, 노인이 다달이 머리를 깎으니까 한 달이라는 말미가 자연스럽게 정해진 숙제가 되는 셈이다. 

   노인은 독서량에 무척 집착하는 눈치였다. 보약을 많이 먹어야 보양이 되듯 책을 많이 읽어야 사람 구실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게 깎새가 노인이 준 책을 거들떠도 안 보고 구석에다가 처박아 둔 까닭이다. 

   남보다 멍청해 열등하다는 정신병적 증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깎새에게 책은 한 줄기 희망이긴 하다. 도대체 몇 권을 읽어야 지금보다 똑똑해질 수 있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니 시시포스가 바위를 굴리듯 죽을 때까지 딜레마일 수밖에 없겠으나 읽는다는 그 자체로, 읽지 않아도 손 닿으면 잡힐 곳에 두어 권 쌓아두는 것만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강조하건대 위안이지 자랑이 아니다. 

   과시욕 강한 이는 책을 많이 읽고 잘 읽는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그걸 컨텐츠화해서 대중의 관심을 즐기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책이 인생의 유일한 낙이라면서 떠벌이기도 한다. 문제는 우월한 독서광임을 드러내 금전적 이익을 꾀하려는 도착적 발상이다. 맘몬의 썩은내가 솔솔 풍기는 자에게 과연 무엇이 궁극적인 목적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문학 전집을 빌려준다고 떡이 생길 리 만무하지만 노인은 그런 깎새의 의중이라도 살피는 최소한의 예의는 갖췄어야 했다. 선반에 놓여진 서너 권 책만 보고 동족임을 짐작해 세상의 양식糧食은 책에서 얻는 양식良識 외에는 없다는 식으로 독서지상주의를 게거품을 물어가며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려는 노인이 차라리 안쓰러웠다. 

   독서는 독락獨樂으로도 충분히 즐겁다. 노년에 찾은 낙을 설파하려는 시도를 나무랄 수는 없겠으나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취향이지 생색내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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