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Mar 23. 2024

백인 청년

   얼굴이 허여멀건 멀대가 불쑥 들어와 어눌하게 물었다.

   "머리 깎어요?"

   혹시 몰라 깎새가 짧은 영어로 주의부터 줬다.

   "no card, only cash."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ATM?"

   이번에는 깎새가 알아듣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옆으로 연신 흔들어제끼면서,

   "옆에 편의점, 편의점."

   "감사합니다."

   넙죽 수그리고 나가 버렸다. 수 분 지나 다시 들어온 백인 청년.

   "얼마예요?"

   "(오른손을 들어 쫙 펴서는)5천 원, five thousand won. 싸다, 싸!"

   값부터 치른 백인 청년 이발의자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어 열심히 뭔가를 검색하려다 인터넷이 안 되는지,

   "와이파이 안 돼요, 내 거."

   대충 감 잡은 깎새가 얼른 제 스마트폰을 가져와 검색창을 띄웠더니 'short men's spiky'를 입력하고서는 그 이미지를 보여준다. 짧은 스포츠형 비스무리했다. 깎새가 노파심에,

   "똑같게는 못해요. similar, similar, OK?"

   엄지와 검지를 둥그렇게 모으는 게 OK란다.

   베트남, 필리핀, '-스탄' 붙은 나라 사람은 간간이 접했지만 허여멀건 백인은 처음이라 호기심이 발동해 말질하기 바쁜 깎새였다.

   "Where are you from?"

   "영국에서 왔어요. 아빠 미국사람, 엄마 영국사람. 하지만 북아일랜드에서 살았어요. 북아일랜드 알아요?"

   아는 체는 해야겠는데 영어는 짧고 아는 건 별로 없어서 잠시 망설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 막무가내로 들이밀었다,

   "알지, 알지. 기네스 맥주. 카악, 죽이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백인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ya, ya. 하지만 거긴 아일랜드. 나는 북아일랜드. 타이타닉. You know?"

   타이타닉 배를 북아일랜드 조선소에서 건조했다는 토막 상식을 주워들은 적이 있어 금세 알아 먹었다.

   대기석에 앉은 다른 손님이 느긋해 보여서 내친 김에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한국에 무슨 일로 왔냐고 물어보려는데 문장은커녕 단어도 생각이 안 나서,

   "you, what person?"

   되도 않게 물었는데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나, 영어강사."

   대답이 돌아왔다.

   "5년 전 한국 왔어요. 천안, 나사렛대학교 교수. 하지만 지금 부산 왔어요. 부암동. 영어학원 강사. ○○○영어학원(부근에 있나 본데 처음 듣는 상호라 기억을 못하는 깎새)."

   "How old are you?"

   "나, 31살."

   "married?"

   "나, 혼자 살아요. 솔로."

   깎새가 앞거울에 비친 자기를 가리키면서,

   "me?(나는 몇 살로 보여?)"

   물으니까 모르겠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서,

   "I'm fifty two."

   "What?"

   놀라는 눈치였다. 보기보다 겉늙어서 놀란 건지 동안이라서 놀란 건지 분간이 안 갔지만,

   "I'm baby-face."

   깎새가 잔망을 떨자 파안대소하는 백인 청년.

   말끝마다 '하지만'을 붙이는 말버릇이 유난스러우면서 끝끝내 한국말을 쓰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기특했다. 손짓발짓 다 섞어서라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대기석 손님이 늘자 마음이 급해져서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작업을 끝낸 머리를 가리키면서,

   "How?"

   했더니, 

   "좋아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가까이 살면 다음에도 꼭 들르라는 작별인사가 떠오르지 않다가 결국,

   "See you later."

   손을 흔드니까,

   "또 봐."

   반말인데 듣기 싫지가 않더라.

   마누라와 퇴근하는 길에 백인 청년 얘기를 해줬더니 점방에서 TV 드라마만 보지 말고 이참에 영어회화나 배워 보라는 지청구가 돌아왔다. 반박 불가인 게 실은 깎새도 난생 처음 영어회화의 필요성을 느낀 바여서.

   목마른 놈이 우물 판다고 한국에 제 발로 들어왔으면 한국말로 의사소통해야 한다는 게 깎새의 돼먹잖은 기조였지만 점방을 차리고부터 금이 살짝 가기 시작했다. 근래 부쩍 손님으로 찾아오는 에트랑제가 솔찬해서 장사 편하게 해먹기 위해서라도 이른바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 이발소에 쓸 수 있는 간단한 회화쯤 익혀두면 유익할 듯도 싶었다. 그런 와중에 백인 청년이 가슴에 불을 지핀 셈이고. 

   한국사람이 생면부지인 한국사람과 대면할라치면 보이지 않는 벽이 느껴진다. 혹시 허점이라도 잡힐까 경계심이 대단하다. 하지만 이역만리 타국살이에 지친 에트랑제는 좀 다를 터이다. 가뜩이나 외롭고 정에 굶주린 이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만으로도 경계심을 삽시간에 무장해제시켜 버릴 게다. 마음이 이완되어 풀어내는 에트랑제의 경험담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이국적이고 유별날 게 틀림없다. 무엇보다 에트랑제라서 겪는 애환은 나라 밖에서 살아본 적 없는 깎새한테는 대단한 문화적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요는 망설이는 이의 입을 열게 해 술술 나올 넋두리를 알아듣자면 최소한 세계 공용어라는 영어 하나쯤은 대충이라도 장착해야 가능하다. 하여 지금 이는 심적 변화는 충동적이 아니다.  

   어떻게 깎을지를 영어로 물어보는 것쯤은 깎새로서 기본 아닐까?

   ​- How should I cut it? (어떻게 잘라 드릴까?)​​

   - What brings you to Korea?​(한국에 왜 왔어요?)

   - what interested you in korea in the first place? (한국 생활은 어때요?)​​

작가의 이전글 점방 안 팝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