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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02. 2024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2017년 9월 27일자 경향신문에 한 배우에 관한 칼럼이 실렸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 출연해 9년 동안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 김규리(개명 전 김민선). 2008년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명박 정부의 미국산 쇠고기 졸속 협상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사람들 뇌리에 각인된 건 비유로 든 ‘청산가리’, 단 네 글자. 이후 9년 동안 “청산가리 먹겠다더니 왜 안 먹었어?” “너 아직도 안 죽었니?”라는 댓글에 시달려야 했고 그 때문에 ‘김규리’로 개명까지 했지만 ‘청산가리 여배우’라는 프레임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죽어, 죽어, 하니까 (실제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했단다. 이명박 정부의 문화·연예계 블랙리스트에 문성근, 명계남과 함께 그의 이름이 발견돼 치명적인 피해를 입자 문성근은 본인도 국정원이 조작한 나체 합성사진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후배 김규리의 고통을 어루만져 달라고 호소했다. “한창 자신을 키워나갈 30대 초반에 불이익을 받았기 때문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따뜻한 관심과 격려를 해달라.”

   당시 칼럼 저자는 국가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일그러져 버린 삶을 안타까워 하면서도 다시 배우로서 삶을 이어가길 바라는 응원을 보냈다. 


​   김규리라는 배우의 커리어가 이명박 정부의 방해가 없었다면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역사가 그렇듯 개인의 삶에도 ‘가정’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가가 개인의 삶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순간 자연인이 책임져야 할 영역과 국가권력의 영역이 뒤섞이고 혼재되면서, 김규리라는 배우의 커리어와 이후 그 개인의 삶에 일어난 모든 일의 책임으로부터 정부는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왜곡되고 일그러진 삶을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린 이명박 정부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잃어버린 지난 9년을 도대체 무슨 수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 정부는 책임질 수도 없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

   국가가 누군가를 고문하고 9년 동안 감옥에 가둬야만 잃어버린 9년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만든 문서에 ‘김민선’이란 단 세 글자를 적는 것만으로도 배우 김규리의 지난 9년은 개인이 컨트롤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국가는 “세금을 안 밀리려고 돈 없으면 은행에서 빌려서라도 세금을 냈다”는 김규리씨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로 밀어 넣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규리씨는 이명박 정부의 ‘리바이어던’ 어깨 위에 올라탄 사람들로부터 악플과 비난에 시달리고 있다. 여전히 재능있고 아름다운 배우 김규리씨에게 마음 깊이 응원을 전한다.(<정유진의 사이시옷-김민선과 리바이어던>, 경향신문, 2017.09.27에서)


​   그가 출연한 영화 신작이 나왔다. 영화 <1980>은 1980년 5월 광주 소시민 얘기를 다뤘다. 영화 홍보차 <매불쇼>에 감독과 출연한 김규리는 무척 밝았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고故 노회찬 의원 이후로 정치인 연설에 가슴 뜨거워지긴 실로 오랜만이다. 그 정치인을 벼랑 끝까지 내몰았던 무도하고 무식하며 무책임한 검찰권력에 의해서 그의 야수성이 발현된 건 아이러니다. 인간사 새옹지마야말로 진리다. 그는 스스로 흠결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2심까지 유죄여서 최종 유죄일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내건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불사를 것이다. 한겨레신문 칼럼에서 조국 현상을 이렇게 분석했다.


   정당 이름에 대표 이름과 같은 의미의 단어를 넣고, ‘3년은 너무 길다’고 외치는 조국혁신당이 포퓰리즘 성향을 띠고 있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기성 정당 구도를 깨고 등장한 유럽의 제3 정당들이 예외없이 포퓰리즘이란 비판을 받았던 걸 떠올리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스페인에서 좌파 제3세력 정당으로 돌풍을 일으킨 포데모스 지도자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 “우리를 포퓰리즘이라 비난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인 건 시사적이다. (<박찬수 칼럼-조국이 뒤흔든 선거, 정치 지형까지 바꿀까>, 한겨레, 2024.03.27 에서)


​   그 역시 좌고우면하지 않고 밀어붙일 기세다. 그런 야수성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살아있어 줘서 고마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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