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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03. 2024

정체

   작년 11월 즈음 산재 판정을 받아 10개월째 가료 중이라고 밝힌 손님은 매달 커트만 하다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염색까지 주문했다. 구청 공무직(무기계약직) 면접이 곧 있을 예정인데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서라나. 몸도 성치 않은데 전직이라니 뚱딴지같아 사연을 들어보니 관할 구청에서 전례없는 호조건으로 인력을 선발한다고 해서 지원했고 합격하면 다니던 회사 미련없이 그만둘 거라고 포부를 밝혔다. 8명 채용에 21명만 서류 전형에 합격해 3:1 경쟁률이라 승산이 높다면서. 무얼 하는 공무직인지는 안 밝히고.

   원래 하던 일(그게 뭔지도 말해 주지 않았다)이 사고 위험이 커 전직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게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돈 때문이었다. 더 많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직장(구청에서 연봉 5천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 공무직이 무엇인지 몹시 궁금했다)으로 갈아타고 싶을 만큼 그는 돈이라면 환장을 했던 것이다. 지지리 궁상을 떨 만큼 가난해서? 아니다. 그가 직접 밝힌 재산 규모는 40대가 될까 말까 한 미혼 남성이 보유하기에는 제법 컸다. 당시 대화 내용이다.

   "쉬고 있다고 월급 안 나오는 건 아니겠죠?"

   "당연하죠."

   "한 3~4백?"

   "산재 판정 받으니까 월급 말고 좀 더 붙어요. 4백은 넘어요."

   "아픈 사람 앞에 두고 이런 말하기 좀 거슥하지만, 꽤 짭짤하겠네요."

   "병원 다니느라 발품 파는 걸 따지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매달 4백만 원씩 열 달이면 4천만 원. 암만 봐도 겉 멀쩡한 사람같아 이 친구 '꾼' 아닌가 아래위로 훑으면서 의심했더랬다. 고물가로 돈이 돈 같지가 않다는 둥 부산 ○○○구청 환경미화원으로 들어가 월 6백만 원 넘게 번다는 친구만 생각하면 왜 자기도 환경미화원으로 갈아타지 않았는지 땅을 치고 후회한다는 둥 입만 열었다 하면 돈, 돈, 돈 온통 돈타령뿐이었다. 순진하고 수수하게 생긴 면상과는 전혀 다른 속물의 극치를 보이는 게 능력이라면 능력이겠다.

   "사장님, 10억 다 못 쓰고 죽으면 억울하겠죠?"

   "억울할 새가 어딨어요? 자식들 키우랴 사는 집, 자동차 밑으로 매달 들어가는 비용이 도대체 얼만 줄 아세요? 또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순 없잖우. 때가 되면 외식하고 여행도 다녀야지 철마다 옷도 사 입어야지. 돈 들어갈 데가 천지삐까리인데 억울하긴. 안 모자라면 다행이지. 아니 그보다 다달이 들어가는 게 많아 빠듯한데 어느 세월에 10억을 모으겠어요. 안 그래요? 손님도 기저귀, 분유값 솔찮게 나갈 텐데 뭘.

   "아이 없습니다. 결혼도 안 했고요."

   "집, 자동차는?"

   "엄마집에서 살고 출퇴근은 스쿠터 타고 다니죠."

   "취미 하나쯤은 있을 텐데."

   "오토바이 동호회 몇 번 다니다가 관뒀습니다. 귀찮더라구요."

   무슨 재미로 사냐.

   "요즘 부쩍 10억 다 못 쓰고 죽으면 어쩌나 불안해져서 미치겠어요. 어디다가 쓰면 좋을까요?"

   "그런 불안은 10억을 손에 쥐고 나서 해야 현실적이에요."

   "10억 있어요."

   "아니, 희망사항 말고 진짜 통장에 잔고 찍고 나서 얘기 해보자니까?"

   "10억 있다니까요. 보여 드려요? 결혼 안 하고 아이 없고 집은 엄마 집에 얹혀 살면서 월급 고대로 모았더니 10억 됐어요. 근데요, 돈은 자꾸 부는데 겁이 나서 쓰질 못하겠어요. 그러니까 자꾸 불안해져요.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드럽게 재수없는 새끼.

   그가 맡은 공무직이 무엇인지 그 정체가 며칠전 드디어 밝혀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녹화한 동영상을 보여주자 그가 뭘 하면서 돈을 버는지 알게 되었다. 

   "아침에 ○○ 나가보면 쓰레기 천집니다. 그걸 마대 자루 십수 개씩 치우다 보면 하루가 다 가요. 구역 바뀔 날만 기다리고 있어요. 얼마 안 남았어요. 거기에서 멀어질수록 꿀보직입니다."

   부산에서 가장 번화한 곳을 관할하는 지자체 환경미화 공무직이 그의 지금 직업이다. 연봉 세고 처우 괜찮아 보여서 들어갔지만 신입을 제일 빡센 구역에 배치하는 것까진 미처 몰랐나 보다. 

   "아는 동생이 ○○○구 환경미화원인데요. 거기는 할 일이 없대요. 시간과의 싸움이라나. 그런데 걔네들 연봉이 6천이 넘어요. 나는 뺑이치는데 걔네들보다 못 받아요."

   ○○○구민으로서 깎새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청에 직접 문의를 할까 고민중이다. 할 일이 없어 시간 죽이는 환경미화원 연봉이 6천이 넘는 게 맞는지.

   안 하던 염색을 한 뒤로 발길이 뜸했던 때때모찌 청년을 몇 달 만에 봤음에도 여전했다 재수없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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