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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05. 2024

행님

   일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 세 분이서 길을 걷는데 "언니, 내가 더 가깝지예?" "맞네 야야. 우리 집보덤도 더 가찹네." 정답게 주고받는 대화에 팍 꽂혔다. 중늙은이들 입에서 오르내리는 그 '언니'라는 호칭이 하도 참신하게 인상적이어서 가던 길 멈추고 도란도란하는 그들 뒷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봤던 게다. 그 '언니'가 '행님'으로 치환되는 동시에 트리거가 되어 추억을 격발시키고야 말았다. 그 호칭이 그날을 새삼스레 소환해 망자를 향한 그리움만 증폭시켰다. 

   2019년 초여름, ROTC 바로 윗기수 행님들 일곱 명이 그해 정례 모임을 종철행님이 근거지로 삼은 경남 거창에서 가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당시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망조가 들어 뭘 해도 안 되는 처지를 비관하던 자가 거기를 왜 가려고 했는지 그때 심경을 복기하기는 어렵다. 확실한 건 외박을 불사하면서까지 경남 거창행 시외버스를 탔고 거창 시외버스터미널 근처 한 횟집에 집결한 행님들을 만나 한껏 들떴다는 거다. 격식을 차린 고급스런 만찬 따위는 애시당초 가당찮았다. 체면이니 위신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행님들은 스물 두세살 ROTC 2년차 시절로 되돌아가 쭈뼛대는 1년차 후배이자 동생 녀석한테 후래삼배後來三杯를 들이켜게 하고선 함께 그날 밤을 온전히 달리고 달렸다. 

   그들에게 동생은 그저 이십 대 때 그 동생일 뿐이었다. 잘났건 못났건 귀하건 천하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코 변하지 않을 천진난만으로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대범함을 '허물없는 사이'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충분한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행님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면서 실로 오랜만에 사람 사는 맛을 만끽했었다. 거칠고 투박하게 내뱉지만 그 말 속에는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통찰력이 깃들어 있는 모임의 좌장 격 종철행님이 너스레를 떨었다.

   "만아(동기나 동생들을 부를 때 쓰는 종철행님만의 시그니처 호칭이다. "좆만한 새끼야"가 본딧말쯤 될 게다. 남자 성기를 불쑥 들이대는 바람에 남사스러울 텐데 종철행님한테 그 호칭으로 제발 불리워지고 싶어 안달인 사람이 수태인 걸 보면 사람을 변태로 만들 줄 아는 기막힌 능력을 가진 행님임에 분명하다), 살다 보면 다 그런 기다. 이 행도 사업하다 여러 번 자빠진 거 아나 모르나. 그래도 허물없이 만날 수 있는 자슥들이 있다는 기 위안인 기라. 때마다 이리 보는데 바랄 기 또 뭐 있겄노."     

   매년 한 번 모이던 걸 두 번으로 늘린 행님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진 각자 근거지를 모임 장소로 정해 전국 유람하듯 즐겼다. 작년에는 제주도까지 진출해 한라산을 등정했다. 종철행님은 다른 행님들과 어울려 완등했다. 그런 행님이 그제 사망했다. 향년 54세. 

   문자 부고에 박힌 '김종철 본인상'을 여태 받아들이지 못해 패닉에 빠졌다. 삶을 지탱해 주던 끈 하나가 허망하게 끊어져 버린 듯한 절망감에 허우적댄다. 슬픔보다 두려운 침울이 모든 걸 집어삼킬 게다. 여간해선 쉬 가시지 않을 충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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