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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08. 2024

이천 원 vs. 이백만 원

   엊그제 토요일 오후, 늙은것이 머리털만 수북해서 성가셔 죽겠다는 말이 입에 달린 노인이 석달 만에 찾아와서는 석달 전하고 똑같이 깎새를 떠본다.

   "머리털 많은 것도 귀찮은데 허옇게 새기까지 해서 영 못 봐줘. 원장, 커트에 염색까지 얼만교?"

   "만이천 원이오."

   "집이 여기서 가차워요. 도로 건너면 바로야. 오늘 만 원짜리 한 장 들고 온 김에 염색까지 해 주소."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재생인 게 숫제 상습범이다. 허나 이번만큼은 깎새도 호락호락하지 않는다.

   "어르신, 지난 번에 집에서 머리 감는 조건으로 이천 원 깎아 드렸잖아요. 또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가뜩이나 염색약값까지 올랐는데.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동네에서 커트값이 제일 싼 점방에 와서 요금 깎아 달라고 하시면 저는 뭐 흙 파서 장사하는 줄 아십니까? 문디 콧구녁에서 마늘씨 빼먹는 것도 유분수지."

   실랑이 끝에 집에 가서 이천 원 들고 오면 염색을 발라주겠다는 강수를 관철한 깎새. 만 원짜리 지폐를 깎새에게 맡기고 이차선도로 건너 바로 집이라는 노인이 이천 원을 가져오는 사이 TV에서는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예능 재방송이 방영 중이었다. 개그맨 박명수가 <개그 콘서트>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는 후배 개그맨 신윤승, 조수연과 함께 선배 개그맨 부부인 김학래 임미숙을 찾아 식사를 대접받는 장면. 선배 개그맨 부부는 후배 개그맨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려고 자기들이 운영하는 중국집 메뉴 중에서 최고 요리들만 내놓았던데 박명수가 이런 상을 차리는 데 얼마나 들었냐 묻자 임미숙이 재료값만 이백만 원이 넘는다고 대답했다.

   노인이 건네 준 이천 원을 기어이 받고 검정 염색약을 바르던 중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또 TV에서 들려왔다. 이번에는 KBS 관현악단과 협연을 할 트로트 가수 김호중을 대접하려고 일식 요리사 정호영이 자기 점방에서 대게, 전복, 문어 따위로 거하게 한 상 차린 장면이 나왔고 얼마나 들었냐 묻자 재료값만 역시 이백만 원쯤 들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천 원을 가져와야 염색을 해주겠다고 노인을 제 집으로 내몰면서까지 꾸역꾸역 제값 받아낸 깎새는 연로자를 공경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에 돈밖에 모르는 불깍쟁이인가. 한 끼에 이백만 원하는 식사가 의례적이라고 여기는 치들이야말로 세상을 무난하게 영위하는 정상인들인가. 이천 원을 이백만 원인 양 아득바득하는 깎새와 이백만 원을 이천 원인 양 취급하는 그들 사이 차이는 무엇인가. 도저히 안 좁혀질 간극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그 까닭은 무엇인가. 

   찌질함, 궁상맞음, 상대적 박탈감, 좌절감, 상실감 뭐를 갖다붙여도 설명이 쉽지 않을 묘한 감정에 휩싸인 깎새가 다른 손님 머리를 깎다 말고,

   "엿같네, 젠장."

   채널을 돌려 버렸다. 이발의자에 앉은 손님이 영문을 모른 채 옹송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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