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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pr 11. 2024

보신책의 요체

   사마천 『사기 열전』중에 특히 이목을 끄는 대목은 이것이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형가의 기도가 좌절되자 진노한 진시황은 연나라를 보복 공격함은 물론 접경한 초나라도 공격하려 든다. 암살 주모자인 연나라 태자 단의 목을 가져온 이신에게 진시황은 초나라를 치려면 군사가 얼마면 되냐고 물었고 젊은 이신은 20만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했지만 늙은 왕전은 최소 60만은 되어야 진격할 수 있다며 엄살을 떤다.

   진시황 왈,

   “그렇게 겁을 먹다니 왕 장군도 늙었구려. 이 장군이 확실히 용감하니 그의 말이 맞다.”

   자신만만하게 출격한 이신은 하지만 어이없게도 패배하고 크게 화가 난 진시황은 병을 핑계로 칩거한 왕전에게 친히 납시어 사과하며,

   “과인이 장군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니 이신이 진짜 진나라의 군대를 욕보였소이다. 지금 듣자하니 초나라의 군대가 하루하루 서쪽으로 압박해 들어오니 장군이 병중이긴 하지만 어찌 과인을 버릴 수 있겠소.”라고 했다.

   왕전은 60만이 아니면 전장에 나갈 수 없다 했고 진나라 군사란 군사 60만을 싹싹 긁어모은 진시황은 출정을 종용한다. 대장군을 전송하는 자리에서 이 왕전이란 늙은이가 진시황에게 요구한 게 뭔고 하니 좋은 땅과 집, 정원과 연못이라나. 기가 막힌 진시황이 떠나는 마당에 뭔 걱정이냐 이기기만 하면 다 해주께 했단다. 함곡관을 나가면서까지 이 노老장수는 다섯 번이나 진시황에게 사람을 보내 뱉은 말 꼭 책임지라며 떼를 쓴다.

   이 영감탱이가 노망이 났나. 보다 못한 왕전의 부관이 한 마디 한다.

   “채신머리없게 뭣 하는 짓입니꺼. 전쟁 이기면 어련히 알아서 해줄 낀데. 값 떨어지게시리.”

   왕전은 그제야 속엣말을 푸는데,

   “니는 그리 겪고도 모리겠나. 저 진왕은 성질이 사나울 뿐더러 사람을 절대 안 믿어. 진나라 안 군사란 군사는 다 긁어모아 나한테 줬는데 만약 내가 딴 맘 묵고 진나라로 말머리를 돌리면 무혈입성이야. 걔 목숨은 내 칼에 달렸고. 의심이 안 들까 너라면? 땅이니 집이니 지한테 허접한 걸 자꾸 요구해서 나는 반역할 놈 아닙니다, 해야 갸가 안심을 할 거 아닌가베. 야, 나도 오래 살고 싶거덩.”


​   은혜를 베풀 줄 모르고 폭압적 정치를 일삼는 극악무도한 사람으로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진시황 밑에서 진나라 모든 군대의 지휘권을 받고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처세술의 요체는 무엇일까. 백기, 염파, 이목과 더불어 중국 전국시대 가장 뛰어난 네 장수로 손꼽히며『천자문』에 '기전파목 용군최정起翦頗牧 用軍最精(진나라 백기, 왕전과 조나라 염파, 이목이 군대를 씀에 가장 능통하다)'이라 길이 남을 치밀한 전략가만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백기는 장평대전 대승 이후 실각해 유배를 당하는 수모를 겪다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염파는 전장에서 밀려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 다니다 쓸쓸히 죽었으며, 이목은 조나라 간신 곽개 모함으로 죽었다. 이는 장수 개인의 특출함을 시기, 질투하는 윗선과 어그러진 까닭이었으니 의심 많기로 소문난 진시황 밑에서 적당히 어리석어 보임으로써 받아낼 수 있는 지원은 몽땅 받아내는 것은 물론 소신대로 전쟁을 이끌어 국가 안녕까지 같이 지켜낸 왕전의 얄밉도록 능글맞은 보신책이야말로 『사기』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 중에서도 특히 입체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각광받을 만하다.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할 줄 아는 안목이 결국 처세의 기본 중에 기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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