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May 01. 2024

나이 드니 더 와닿는 글귀

   나이를 먹고 나서야 눈에 들어오는 글귀는 분명 있다. 그러니 나이듦이 서러운 것만도 꼭 아니다. 같은 글귀를 15년 전부터 희한하게도 5년 주기로 읽는데 읽을수록 더 와닿는다. 아마도 추사에 비할 바 못 되나 깎새 또한 세한歲寒의 굴곡이 제법 파란만장했던 까닭이겠다.

   한때 해동제일海東第一이니 아조초유我朝初有의 인물이니 하며 치켜세우며 절친했던 벗들은 그가 제주도로 유배된 뒤로는 소식조차 전해 오지 않았다. 다만 중인이자 역관이었던 이상적만이 변함없이 추사 김정희와 맺은 인연을 각별하게 챙겼다. 제주도 유배 5년이 흐른 1844년, 육지에서 《우경문편(藕耕文編)》이라는 거질의 책이 바다를 건너와 추사에게 전해진다. 이상적이 만 리 밖 북경에서 여러 해를 두고 구해서 보내 준 귀중한 책이었다. 추사는 그를 칭찬하는 뜻에서 갈라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온전한 붓으로 발문을 썼다. <세한도>는 이렇게 탄생한다.


​<세한도 발문(歲寒圖跋文)>

지난해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집》 두 종류의 책을 부쳐 오고 올해에는 또 《우경문편》을 부쳐 오니 이 책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것이 아닐뿐더러 천만 리 밖에서 여러 해에 걸쳐 구입하여 보낸 것이니 한때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 세상의 도도한 흐름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좇아 그것을 얻기 위해 마음과 힘을 이토록 허비하는데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마침내 바다 바깥 초췌하고 바싹 마른 늙은이에게 돌아가기를 마치 세상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듯 하는구나.

태사공이 이르길 “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관계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고 나면 사귐 또한 끝난다”라고 했다. 그대 또한 도도하게 흘러가는 세상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스스로 도도히 흐르는 권세와 이익의 밖에 있으니 그렇다면 그대는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단 말인가?

공자께서 이르시길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계절에 관계없이 시들지 않으니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도 그대로 똑같은 소나무와 잣나무일 뿐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단지 날씨가 추워진 뒤의 소나무와 잣나무만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이 이전에 더 잘해 준 것이 없었고 이후로 더 덜어진 것이 없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것이 없겠거니와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것은 한갓 늦게 시드는 굳센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날씨가 추워진 뒤에 감동한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 한漢나라처럼 순박한 시절에 급암汲黯이나 정당시鄭當時같이 어진 사람들도 빈객의 수가 권세와 이익에 따라 늘거나 줄었다. 이를테면 하비의 적공翟公이 문에 걸었던 방문下邳榜門 같은 일이야 박절함이 극에 달한 경우라 할 것이니, 슬프구나! 완당 노인이 쓰다. ​(전호근,《한국철학사》, 메멘토에서 인용)


(참고)

​하비방문下邳榜門 


한 번 죽고 한 번 살아남에 사귀는 마음을 알 수 있고,

​(一死一生 卽知交情)

한 번 가난해지고 한 번 부유해짐에 사귀는 태도를 알 수 있고,

(一貧一富 卽知交態)

한 번 귀해지고 한 번 천해짐에 사귀는 심정을 알 수 있다.

(一貴一賤 卽見交情)​​

작가의 이전글 무서운 건 샤덴프로이데가 전염되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