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최일남 선생 에세이 <웃음의 발견과 한국적 유머>에는 정치인의 유머에 관한 대목이 보인다. 쇳소리와 우격다짐이 난무하는 정치 현장에서 위트 넘치는 응수가 비록 딴 나라 이야기일지언정 일단 재미있다.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잠시 구가하던 시절이던가? 일본 중의원(衆議院)에선 '일목요연'이라는 명답이 나왔다. 한 쪽 눈이 부실한 의원이 질의를 마치는 순간 반대당 의원이 비아냥거렸다. "한 쪽 눈만으로 사물이 옳게 보이겠느냐"고. 그러자 그는 즉각 맞받았다. "당신은 일목요연(一目瞭然)의 뜻도 모르느냐"고.
수의사(獸醫師) 출신인 어느 나라 의원도 연설을 끝낸 다음 비슷한 야유를 당했다. "동물의 병이나 잘 돌보라"는 핀잔을 들은 것이다. 그러자 수의사 의원이 대뜸 상대방에게 물었다. "귀의원(貴議員)께서 지금 어디가 아프신 모양인데, 원하신다면 당장 진찰해드리겠노라"고. 진짜 동물은 너 같은 놈이라는 의미를 점잖게 둘러댄 푼수 아니겠는가. 같은 유머라도 직설법 대신 은유법(隱喩法)으로 말아 올리기 좋아하는 영국인, 그 중에서도 윈스턴 처칠 경이 남긴 그 많은 삽화(揷話)는 대충 주워섬기기조차 난감하다. 의회에서 여성 의원 아스터와 격렬한 응수를 벌인 끝에 나눈 대화 한 토막으로 때우자.
아스터… 당신이 만약 내 남편이었다면 홍차 속에 독약을 넣었을 거예요.
처칠… 만약 아스터 의원이 내 아내였다면 기꺼이 마셨을 겁니다.(최일남, 『정직한 사람에게 꽃다발은 없어도』, 동아출판사, 80쪽에서)
우리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지 않아 대뜸 떠오른 게 노회찬 식 유머다. 특히 정치 토론 중에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은 탁월했다. 김어준은 "홍준표와 토론에서 다이다이를 떠서 상대가 될 만한 정치인은 역대급으로 뽑아도 한 손을 채우지 못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능히 상대가 될 만하다"고 평했다. 다음은 나무위키에서 인용한 노회찬 어록 일부이다.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이제 저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꺼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 2004년, KBS 심야토론에서
KTX가 코리안 택시입니까?
- 2012년 총선 당시 허준영 후보의 KTX 노원 연장 공약을 비판하며
정옥임: 야권 연대면 당을 통합하든가 하지 같은 당도 아니면서 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죠?
노회찬: '같으면 통합을 해야 하는데 다르기 때문에 연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요,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2012년, SBS 시사토론에서
김성태: 정책 보복하지 마세요. 4대강도 이미 20조를 넘게 쓴 사업인데 지금 와서 그걸 철거하고, 물을 빼는 게 잘하는 일입니까?
노회찬: 네.
김성태: 에?
(청중 웃음)
-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
잘못된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신석기 시대가 구석기 시대를 보복합니까?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죠. 청소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 2018년 1월 2일 JTBC 소셜라이브 인터뷰 中
22대 국회가 곧 개원한다. 처칠, 노회찬처럼 '쩌는 유머'까지는 안 바란다. 그저 제 자리에 맞는 어법에만 충실하길 바랄 뿐이다. 괜히 뽑았다는 소리 안 듣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