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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y 25. 2024

정치인의 유머

   고故 최일남 선생 에세이 <웃음의 발견과 한국적 유머>에는 정치인의 유머에 관한 대목이 보인다. 쇳소리와 우격다짐이 난무하는 정치 현장에서 위트 넘치는 응수가 비록 딴 나라 이야기일지언정 일단 재미있다.


​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를 잠시 구가하던 시절이던가? 일본 중의원(衆議院)에선 '일목요연'이라는 명답이 나왔다. 한 쪽 눈이 부실한 의원이 질의를 마치는 순간 반대당 의원이 비아냥거렸다. "한 쪽 눈만으로 사물이 옳게 보이겠느냐"고. 그러자 그는 즉각 맞받았다. "당신은 일목요연(一目瞭然)의 뜻도 모르느냐"고.

   수의사(獸醫師) 출신인 어느 나라 의원도 연설을 끝낸 다음 비슷한 야유를 당했다. "동물의 병이나 잘 돌보라"는 핀잔을 들은 것이다. 그러자 수의사 의원이 대뜸 상대방에게 물었다. "귀의원(貴議員)께서 지금 어디가 아프신 모양인데, 원하신다면 당장 진찰해드리겠노라"고. 진짜 동물은 너 같은 놈이라는 의미를 점잖게 둘러댄 푼수 아니겠는가. 같은 유머라도 직설법 대신 은유법(隱喩法)으로 말아 올리기 좋아하는 영국인, 그 중에서도 윈스턴 처칠 경이 남긴 그 많은 삽화(揷話)는 대충 주워섬기기조차 난감하다. 의회에서 여성 의원 아스터와 격렬한 응수를 벌인 끝에 나눈 대화 한 토막으로 때우자.

   아스터… 당신이 만약 내 남편이었다면 홍차 속에 독약을 넣었을 거예요.

   처칠…​ 만약 아스터 의원이 내 아내였다면 기꺼이 마셨을 겁니다.(최일남, 『정직한 사람에게 꽃다발은 없어도』, 동아출판사, 80쪽에서)​


​   우리라고 그러지 말란 법 없지 않아 대뜸 떠오른 게 노회찬 식 유머다. 특히 정치 토론 중에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와 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은 탁월했다. ​김어준은 "​홍준표와 토론에서 다이다이를 떠서 상대가 될 만한 정치인은 역대급으로 뽑아도 한 손을 채우지 못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능히 상대가 될 만하다"고 평했다. 다음은 나무위키에서 인용한 노회찬 어록 일부이다.


​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이제 저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꺼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 2004년, KBS 심야토론에서


​   KTX가 코리안 택시입니까?

   - 2012년 총선 당시 허준영 후보의 KTX 노원 연장 공약을 비판하며


​   정옥임:​​ 야권 연대면 당을 통합하든가 하지 같은 당도 아니면서 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죠?

   노회찬: '같으면 통합을 해야 하는데 다르기 때문에 연대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요, 우리나라랑 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2012년, SBS 시사토론에서


​   김성태: 정책 보복하지 마세요. 4대강도 이미 20조를 넘게 쓴 사업인데 지금 와서 그걸 철거하고, 물을 빼는 게 잘하는 일입니까?

   노회찬: 네.

   김성태: 에?

   (청중 웃음)

   -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


​   잘못된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신석기 시대가 구석기 시대를 보복합니까?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죠. 청소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 2018년 1월 2일 JTBC 소셜라이브 인터뷰 中​


​   ​​22대 국회가 곧 개원한다. 처칠, 노회찬처럼 '쩌는 유머'까지는 안 바란다. 그저 제 자리에 맞는 어법에만 충실하길 바랄 뿐이다. 괜히 뽑았다는 소리 안 듣게.


https://www.youtube.com/watch?v=SOhGAV_bj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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