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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May 31. 2024

유광점퍼 입은 개구리

   어떤 사람을 떠올릴 때 딸려 오는 이미지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이 유명인한테는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대중적 친근감을 증폭시키는 기제로 작용하는 것과 비슷하게 장삼이사에게 있어서도 해당 인물의 캐릭터를 규정짓는 데 부족함이 없다. 그 남자를 떠올리자 제일 먼저 딸려오는 이미지는 LG 트윈스 유광점퍼다. 대구에서 난 그가 연고지 구단 대신 LG 골수팬이 된 까닭이 수도권에서 대학교를 다녀서인지 아님 다른 계기가 있어서인지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저 한 방을 노리는 빅 볼 야구보다는 안타와 주루를 활용한 아기자기한 야구, 이른바 신바람 야구가 오밀조밀하면서 주도면밀한 그의 성격과 제법 어울려서이지 않을까 넘겨짚어 볼 뿐이다. 무관의 설움을 벗어 던지고 29년 만에 우승을 맛본 지난해, 아주 신이 났을 그다. 재미란 걸 모르고 분투하는 그를 유일하게 울리고 웃기던 게 야구였으니 그를 내내 위로하자면 LG 트윈스가 매년 우승하는 게 바람직하다. 다른 구단 팬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또 다른 이미지로는 개구리다. 개구리라도 다 같은 개구리가 아니고 『미움받을 용기』 저자로 유명한 기시미 이치로의 다른 저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에 등장하는 개구리가 그와 영락없이 닮았다. 


​   개구리 두 마리가 있었다. 두 개구리는 우유가 든 단지 가장자리에서 폴짝 뛰다가 단지 속으로 풍덩 떨어지고 말았다. 한 마리는 "아, 이제 끝장이야!"라고 소리치고는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저 개굴개굴 울기만 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 개구리는 우유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달랐다. 똑같이 우유에 빠졌지만 그 개구리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리저리 열심히 헤엄치며 발을 저었다.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자 발 아래가 단단해졌다. 우유가 치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구리는 폴짝 뛰어 바깥으로 뛰쳐 나올 수 있었다.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박재현 옮김, 살림, 2015, 64쪽)


​   괜찮았던 시절이 없진 않았다. 미증유의 IMF 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 봄, 보험회사에 다행히 입사했다. 재바르고 영특해서 입사 동기들보다 한두 걸음은 앞서 나갔고 이십 대 후반에 이미 경기도 인근에 번듯한 아파트까지 구입해 동기들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었던 남자가 암울해진 건 결혼하고 둘째 아이가 출산한 직후였다. 

   회사 주인이 바뀌자 명퇴를 했고 그 뒤 벌인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건 감당을 하겠는데 루푸스라는 희귀병을 앓게 된 아내 병세가 심상치 않은 건 큰 근심거리였다.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는 환자를 데리고 용하다는 양방, 한방 병원을 찾아다니다 곳간 비는 줄도 몰랐다. 그럼에도 아내는 호전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치료를 위해 장기 입원하는 빈도가 늘어나자 남자는 엄마의 빈 자리를 메우려 두 아이의 양육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엄마가 아프지만 아이들 마음까지 병 들게 할 순 없다면서 말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자라 주었지만 남자는 점점 탈진해 갔다. 버는 건 시원찮은데 목돈 나갈 일만 늘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아파트를 팔고 전셋집으로 나앉았으나 그마저도 얼마 못 가 월세로 돌려야 했다. 사글세를 못 내 보증금이 까졌고 집세 덜한 외지로만 이사를 다녔다. 부모, 형제를 저세상으로 먼저 떠나 보낸 친가는 그렇다 쳐도 배 아파 낳은 자기 딸 사정만은 유독 나 몰라라 하는 장인 탓에 처가에 기댈 엄두가 안 나던 남자는 아내가 입원한 사이 병원비, 생활비를 벌어 보겠다고 다니던 교회 신자들 이 집 저 집을 돌며 아이 둘을 염치 없이 맡겨 둔 채 전단지 배부, 편의점 알바 따위 돈이 될 만한 일이면 뭐든 닥치는 대로 했다. 악전고투는 이럴 때 쓰는 성어다.

   남자 사정을 못 본 척하지 못한 옛 회사 동료가 설득해 솔가해 경남 양산으로 이주한 지 벌써 15년이 되어 간다. 그 사이 아들과 딸은 머리통이 제법 굵어져서 양육 수고는 덜었을지 몰라도 아내 병은 여전하다. 최근에는 유방암 판정까지 받아 항암 치료하러 전보다 더 바쁘게 서울로 오르내린단다.  

   그의 인생은 아내의 득병 이후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에 빠진 형국인 게 냉정한 평가다. 눈꼽만 한 개선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바닥만 벅벅 기다가 종국엔 숨통이 막히지 않을까 그를 아는 지인들은 늘 조마조마했다. 서울을 빠져나오라고 부추긴 옛 회사 동료가 한번은 술김에 위로랍시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자못 심각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초탈한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남자가 맞받았다. 

   "아파도 애들한테는 엄마야. 주어진 시간이 짧든 길든 그때까지 소중한 엄마로 남게 해 주는 게 내 역할이야. 

   요령껏 살아야 해. 개떡 같은 인생이라도 뒤져 보면 활로는 나름대로 있기 마련이지. 다만 쉬지 말고 굴러야 해. 구르다 보면 어느새 둥글둥글해져. 시련도 인생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것이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이것은 낙천주의랑은 좀 다르다. 낙천주의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다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낙관주의는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바로 그 현실에서 출발하는 태도다.

   ​​(...)

   아들러는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낙천적이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비관주의자가 되어 버린다고 지적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패배에 직면해도 놀라지 않는다. 그는 모든 것이 이미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지독한 비관주의자가 겉으로는 낙천주의자처럼 보이고 있는 것이다.(위의 책, 65~66쪽)


​   우연히 그의 아내 카톡 사진 속 장성한 아이들을 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그와 마주앉아 술잔 기울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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