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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01. 2024

어떻게 살 것인가

   비장미 넘치는 영화나 드라마 대단원에서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인 주인공이 치는 대사, 이를테면 '나는 먼저 가지만 너희들은 여기 그대로 있으니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따위는 비현실적인데 진부하기까지 한 클리셰다. 죽음이 곧 소멸일진대 무슨 여한이 남아서 후사를 꾀하려 드는가.

   지독한 회의주의자라면 사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기왕에 엄마 뱃속에서 나왔으니 사라질 때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 그러고 보면 세상 부귀공명이란 것이 참으로 보잘것없고 덧없기 짝이 없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대전제 앞에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바람은 그저 질박한 금욕주의자의 몸부림 정도로밖에는 여겨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죽으면 그만인 줄 뻔히 알면서 우공이산하려는 인간이 수두룩 빽빽이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는 건 사는 만큼 또 하루를 죽는 것이니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는 모순어법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다. 그 저의를 파악할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덜 미온적으로 살 텐데. 알 수 없는 인생이다.


​   사람은 한 번 죽지만, 어떤 경우는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경우는 깃털보다 가볍습니다. 선조를 욕되게 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고 최악이 궁형입니다. 천한 노복이나 하녀도 자결할 수 있는데 제가 어찌 자결하지 못했겠습니까? 세상에서 없어질 문채文彩가 후세에 드러나지 않을 것을 한스럽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천하에 내팽개쳐진 옛 구문을 두루 수집하여 그 행해진 일들을 개략적으로 고찰하고 그 처음과 끝을 종합하고 그 성패와 흥망을 깊이 고찰하여 헌원에서 한무제까지 10표를 만들고, 본기 12편, 서 8편, 세가 30편, 열전 70편,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할 것을 애석하게 여겼기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 책을 저술하여 명산名山에 감추어 두었다가 제 뜻을 알아줄 사람에게 전하여 성읍과 큰 도시에 유통하게 한다면 이전에 받은 치욕에 대한 질책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이니, 비록 만 번 도륙을 당한다 해도 어찌 후회할 수 있겠습니까?(사마천,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에서)​


   그런데 모순적인 어법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일견 모순적인 언어 혹은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곧 살아가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근본 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부에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열망이 공존할 수도 있다. 영화 <애니홀>에서 주인공 앨비 싱어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장수하려고 든다고. 그런 것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추가 주문을 하는 일과 같다고. 실로 그렇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고통의 무한리필이라면, 리필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수를 원한다. 고해라는 인생의 술잔을 한 잔 더.

   『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그러한 모순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는 이상적인 질서가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분투했다. 『논어』 미자微子 편은 말한다. “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道之不行已知之矣)" 이것은 공자를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김영민,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사회평론, 2019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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